중진들의 대반란 "제왕은 가라"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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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개혁파 위원들, 1인 보스 체제에 정면도전…
정치 복원 위해 연합전선 모색


정치권에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3월22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초청 강연이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봄이 오면 개구리도 깨어나는데 뭔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라며 뭔가를 진행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이 날도 이회창 총재를 강하게 비판하며 개헌론과 정계개편론을 주장한 김의원은 앞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했다.

사진설명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 ⓒ시사저널 이상철

행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의원을 비롯해 이부영 한나라당 부총재·정대철 민주당 최고위원·김상현 민국당 최고위원 등 여야 중진 의원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여야 대립 구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민주당 장영달 의원이 "여야의 개혁 세력이 함께 모여 민주개혁 연대회의를 구성하자"라고 제안한 것도 이러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이 일에 참가하고 있는 유인태 전 의원은 "여야의 지역주의와 1인 보스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 세력이 새로운 중심을 만들 필요가 있다"라면서 정치권 안팎 인사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모임과 관련된 다른 인사는 "일단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하기보다는 포럼 형태의 느슨한 틀을 갖출 것이다"라고 전했다. 아직 모임의 명칭과 참여 인사들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벌써 사무실을 물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여야 중진 의원들이 개별로 접촉하는 일도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의지가 강한 쪽은 이부영·김덕룡·손학규 의원 등 한나라당의 개혁파 중진들이다. 최근 김덕룡 의원이 여당 중진 의원들과 본격적으로 만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손학규 의원도 "여야의 무한 정쟁 구도를 깨기 위해 여야 중진 의원들이 모일 필요가 있다"라면서 이를 위해 본격적인 접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사진설명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 ⓒ시사저널 안희태

최근 이들 한나라당 개혁파 중진 의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총재를 비판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보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김덕룡 의원은 이총재에게 미련이 없는 듯 비판 강도가 가장 세다. 또 개헌과 정계 개편을 주장하는 등 현재의 양당 구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김의원이 탈당 순서를 밟고 있다고 본다.

이부영 부총재는 주로 남북 문제과 관련해서 이총재를 비판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총재의 변화 가능성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이부총재는 지난 3월22일 부산대 강연에서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등장한 이후 남북 관계가 위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라면서 이총재가 미국의 눈치를 보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손학규 의원 역시 현재로서는 정쟁 중단 차원을 넘어선 정계 개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그러나 이들 세 의원은 현재 여야 수뇌부가 지역주의와 1인 보스 체제에 안주하며 무한 정쟁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야 중진들이 서로 만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소장파까지 가세하면 정계 '대지진'


사진설명 김상현 민국당 최고위원. ⓒ시사저널 이상철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여당의 '파트너'는 김근태·김원기·정대철 최고위원과 조순형 의원이다. 정대철 최고위원은 이미 김덕룡 의원과 모임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김근태 최고위원도 한나라당 개혁파 중진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제안이 오면 언제라도 만나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최고위원은 "여야 총재 두 사람만 정치를 하고 국회의원들은 거수기로 전락해 극단적인 정쟁이 반복되고 있다"라면서 여야 중진 의원들이 정치 복원을 위해 나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원기 최고위원도 최근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회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는 문제 의식에는 공감을 나타냈다.

이들 여야 중진 의원들이 실제로 정치 현안에 합의된 목소리를 내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우선 당내의 부정적 반응이 문제다. 한나라당에서는 비주류 중진들이 자신들의 취약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밖으로 도는 것이라며 폄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민주당의 경우 최근 가뜩이나 어려운 국면에 들어선 상황에서 팀워크를 흐트러뜨린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이들 면면이 개성이 강하고 당내 입지는 약한 것도 문제다.

그러나 날로 민생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여야의 '제왕'들은 여전히 정쟁의 선두에 서 있다. DJ와 이총재의 영수회담 라인마저 불통해 정치 불신은 점점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치 실종 상태가 계속되면 여야 중진들의 움직임이 탄력을 받을 수 있고, 여기에 여야 소장파 의원들까지 가세한다면 정국에 주는 충격이 클 것이다. 바야흐로 제왕에 대한 중진들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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