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동지들' 다시 뭉치는가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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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 포함한 여야 개혁파, 세력 결집 나서…
대선 앞두고 '신당' 결성 가능성도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는가. 그동안 물밑에서 흐르고 있던 여야 개혁 세력의 결집 움직임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4월11일 민주당 김원기·김근태·정대철 최고위원과 한나라당 김덕룡·이부영·손학규 의원, 민국당 김상현 최고위원 등 7명은 개혁 세력의 결집을 본격 논의하기 위해 첫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비록 모임은 불발에 그쳤지만 이들의 면면을 볼 때 함께 일을 도모한다면 정치권에 미칠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당장 한나라당에서는 '쨍' 소리가 났다. 소장파 의원들에 이어 김덕룡·이부영·손학규 의원 등 개혁파 중진들까지 독자 목소리를 높이자 이에 맞서 최병렬·김용갑 등 한나라당 보수파 의원들은 당의 중심을 잡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뭉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연하던 당내 보·혁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어느 쪽도 내치기 어려운 이회창 총재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이총재측은 보수 의원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비이회창 세력화 아니냐'며 의심하고 있지만, 최근 당 안팎을 넘나들며 보폭을 넓히고 있는 개혁 세력을 더 큰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다. 만일 이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한나라당은 영락없는 보수-수구당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총재는 이부영 부총재로부터 개혁 세력의 모임에 대해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강도는 다르지만 민주당에도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최근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과 김근태 최고위원은 한화갑 최고위원까지 포함한 민주 세력 단합론을 제기한 바 있다. 여야를 넘나드는 개혁 세력의 결집 움직임은 이들 한-노-김 3인 연대를 간접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당장 이인제 최고위원은 민주 세력 단합론에 불만을 나타내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33쪽 기사 참조). 여야를 뛰어넘어 개혁 세력이 뭉치면 현재의 구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이회창 총재나 이인제 최고위원에게는 작지 않은 위협 요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야 정치권의 견제가 걸림돌이 되기는 하겠지만 개혁 세력 결집을 추진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은 이미 교감을 마친 상태여서 조만간 느슨한 형태라도 모임의 틀을 갖출 가능성이 높다. 이 모임을 추진하고 있는 한 핵심 인사는 여야 의원 30여명, 전직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10여명, 정치권 밖의 각계 인사 수십 명 등 100여 명 규모로 모임을 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역 의원으로는 앞서 거론된 여야 중진 7명을 비롯해 민주당 이창복·장영달 의원, 한나라당 김원웅·서상섭·안영근·김부겸·김영춘 의원이 원칙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고, 유인태·이 철·박계동 전 의원과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권 밖의 인사로는 함세웅 신부·조준희 변호사·백낙청 교수·임재경 전 〈한겨레 신문〉 부사장·신경림 시인 등 과거 민주화운동의 원로급 인사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여야 중진·전직 의원·민주화 원로 등 100명 참여




참여 인사들의 공통된 인식은 정파를 초월해 지역주의 타파, 정치 개혁, 남북 화해 등을 논의하고 이를 추진할 개혁 세력의 구심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특히 내년 대통령 선거가 바르게 치러지는 데 이 모임이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내년 대선 구도가 수구-보수 경쟁이 아니라 개혁 경쟁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이다"라고 밝혔다. 지난 총선 이후 자민련이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여야가 앞다투어 보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 내년 대선까지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개혁 세력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게 되면 역시 가장 큰 관심사는 이들이 개혁 신당으로까지 내달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참여 인사들은 공개적으로는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내심으로는 제3 세력화나 신당 결성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부터 모임 결성을 논의해 온 한 의원은 아직 그런 얘기를 할 시기는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정국 변화에 따라 내년 대선을 앞두고 독자 세력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밖에서 모임을 추진하고 있는 한 인사는 아예 이번에 개혁 신당을 결성하자는 주장도 펴고 있다.


개혁 신당 결성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있다. 우선 DJ 정권으로부터 급격하게 민심이 떠나고 있으나 이회창 총재의 지지도 역시 정체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 상황. 김상현 민국당 최고위원은 지금 상황이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이 일어났을 때와 유사하다고까지 진단하고 있다.


만약 교섭단체 정수가 줄어들면 그것도 강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개혁모임 소속인 한 의원은 "만일 교섭단체 정원이 10명으로 낮춰진다면 당장이라도 독자 정당을 결성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여야 소장파 의원 중에 이런 생각을 밝힌 의원이 4명은 넘는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오는 5월 임시국회에서 국회법 개정안을 표결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신당 창당 시도가 있었지만 걸림돌은 역시 돈 문제였다. 그러나 내년에 지급될 국고보조금 1천1백39억원은 신당에 유력한 자금원이 될 수 있다. 지방자치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년에는 유권자 1인당 3천4백원씩 총 1천1백39억원이 정당 보조금으로 지급될 예정이다. 올해의 4배가 넘는 액수다. 만일 내년 3월 초까지 개혁 세력이 독자 교섭단체를 결성하면 내년 한 해 동안 1백50억 원이 넘는 국고 보조금을 받는다. 신당 결성에 필요한 돈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년만큼 좋은 기회도 없는 셈이다.


여야 내부 사정 등 앞으로의 정국 변화 역시 개혁 세력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큰 변수다. 한나라당 개혁파의 한 의원은 이회창 총재가 영남과 수구 세력에 기울어 있는 지금의 노선에서 벗어나 수도권 중심 노선, 보수와 개혁이 공존하는 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몇몇 개혁파 의원들은 올해 말까지 이총재의 변화 가능성을 지켜보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독자 세력화를 위해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내비치고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결정 과정 역시 개혁 세력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동교동계 등 당 주류가 바람몰이를 통해 보수적인 인물을 후보로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내 개혁 성향 주자와 의원들이 집단으로 '제3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민주 세력 연합론이 민주당의 차기 구도로 굳어지면 민주당의 차기 주자를 중심으로 여야의 개혁 세력이 결집하는 경우도 예상해 볼 수 있다.


3김 같은 리더 없어 구심력 약해


그러나 객관적 조건이 개혁 세력 결집에 유리하게 조성되더라도 관건은 주체 세력이다. 우선 각자 개성이 강하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력이 약하다는 점이 문제다. 3김과 같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대표 선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탓에 여야의 현역 의원들은 원칙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을 뿐 아직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진 의원들의 경우 딴살림을 차리는 것 아니냐는 당내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소장파 의원들도 개혁모임의 내부 사정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개혁모임은 그동안 주력해 온 국가보안법 등 개혁 입법 작업이 차질을 빚으면서 '제 코가 석자'인 상태다. 개혁모임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개혁모임은 강화하면서 새로운 포럼 모임에는 개별적으로 참여하자는 분위기다.


대표 선수가 없으면 확실하게 밀어붙일 몇 명이라도 필요하다. 그동안 실패한 경험을 볼 때 이번에 개혁 세력이 독자적인 길을 가려면 주도하는 핵심 세력은 17대 총선은 포기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 독자 정당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의원은 "5명만 희생할 각오로 확실하게 뭉쳐도 세를 모을 수 있다"라고 입맛을 다셨다. 여야 의원들 가운데는 '확실한 5명'이 관건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명이 필요했듯이 개혁파가 그들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확실한 5명'이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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