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신당, 아니 땐 굴뚝 연기인가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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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박근혜, 창당설 부인해 일단 잠복…
여건 충분하고 파괴력 커 출현 가능성 상존


발단은 또 골프장이었다. 지난 5월6일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들과 서울 근교의 한 골프장으로 라운딩을 나갔다. 여기에서 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둘이서 당이나 하나 만들까?"라고 한마디 툭 던졌다. 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두 사람은 박부총재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 양재동의 한 실내 테니스장에서 자주 운동을 했던 막역한 사이다.




이전에도 정의원이 여러 번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한 터라 경향팀은 이 말을 '창당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밀착 취재에 돌입했다. 5월11일자 '정몽준·박근혜 신당 추진' 기사는 그 결과였다. 요컨대 '정몽준 의원이 박근혜 부총재·김덕룡 의원 등 한나라당 비주류와 새 정당을 꾸릴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특종'이라는 이름까지 단 이 기사는 졸지에 오보로 전락할 조짐이다. 관련 인사들이 신당설을 극구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정의원은 신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2002년 6월 월드컵 전까지는 어떤 정치 행보도 하기 힘든 상황이고, 신당과 관련해 누구와 접촉하거나 논의를 진행한 사실이 없다"라고 밝혔다. 박근혜 부총재는 "신당 참여설은 나와 관계없는 얘기이며, 한나라당을 탈당할 생각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덕룡 의원 역시 "정의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내가 참여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난 셈이다.


"정몽준 신당, 4·13 총선 이후부터 준비"




그러나 정가 소식통들에 따르면 '정몽준 신당'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으로 알려진다. 4·13 총선 직후 정의원측으로부터 '신당 프로젝트'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받았던 한 전략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1999년 초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정의원은 민주당도 더 이상 민심을 얻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후 신당 창당 쪽으로 발전했고, 그 때부터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의원이 총선 직후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은 쉽게 확인된다. 한 예로 이번에 '정몽준 신당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박 아무개 보좌관은 그 즈음 영입된 인사다. 언론계 출신인 박보좌관은 지난해 11월 월간 〈경실련〉과의 인터뷰에서 정의원의 대권 도전을 암시하는 답변서를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정의원이 신당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올 봄부터다. 그는 4월27일 의회발전연구회 토론회에서는 "새로운 정당이 출현해 기존 정당 질서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라고 했고, 5월8일 MBC와의 인터뷰에서는 "신당에 사람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돕겠다. 김용환·강창희 의원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라고 말했다. 5월13일에도 이런 기조는 이어졌다.


하지만 정의원 주변 인사에 따르면, 현대 문제 때문에 정의원이 직접 대권 주자로 나서는 데에는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다. 박부총재를 대신 내세우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다면 과연 정몽준-박근혜 신당은 빛을 볼 가능성이 있는가?


일단 여건은 충분히 성숙되어 있다는 것이 정가의 중론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새 정치 세력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야 정치권에 대한 지지율은 20%를 밑도는 반면, 무당파가 60∼70%에 이르는 것이 대표 사례다. 직선제가 실시된 이래 대선 때마다 새 정당이 등장해 이삭줍기를 시도했던 것도 신당 출현 가능성을 높여 준다(26쪽 상자 기사 참조).


오는 5월27일 창립대회를 여는 '포럼, 화해와 전진'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런 무주공산 표를 노리고 '개혁 신당'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시각에서다. 하지만 '개혁 신당'과 '영남 신당'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파괴력이 크냐에 대해서는 대다수 전문가가 영남 신당을 꼽는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우리나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당이 존립하기 힘들다. 꼬마 민주당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이에 반해 정몽준 의원은 울산에, 박근혜 부총재는 대구·경북에 튼튼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어 의외로 위협적인 신당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영남 신당의 잠재력은 지난 5월3일자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도 잘 나타났다. 영남 민심은 이회창 총재를 영남 대표로 인정하지 않아 영남을 기반으로 한 당과 후보가 나타날 경우 그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신당 창당에 필수인 조직과 자금도 그리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는 관측이다.


일각에는 누가 정몽준 의원이나 박근혜 부총재를 보고 움직이겠느냐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일단 박부총재가 깃발을 들면 현역 의원만 해도 10명 가까이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과연 배지를 달 수 있느냐 아니냐를 거취를 결정할 최고 지표로 삼는데, 박부총재는 표몰이 위력을 가지고 있어 의원들이 동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TK 출신인 한 의원은 사석에서 "박부총재만 움직이면 무조건 따라 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총선 당시 자꾸 떨어지던 지지율이 박부총재가 한번 유세를 하자 급상승한 것을 경험한 후 '박근혜 신드롬'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다.


같은 맥락에서 민국당 김윤환 대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김대표가 박부총재를 대권 후보로 점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김대표가 요즘 박희태 의원 등 한나라당 비주류 의원들과 자주 만나고 있다. 이번 신당설에 김대표가 관련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정의원 진영에서는 원내 교섭단체 기준을 10석으로 낮추는 국회법이 통과되기만을 학수고대했다는 후문이다.


자금에 관한 한은 '정몽준'이라는 이름 하나로 다 해결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정의원은 국회의원 가운데 최고의 재력가로 올해 재산 신고액이 1천1백74억원이다. 재계에서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의원에게 계열사 중에서도 기반이 튼튼한 현대중공업과 미포조선을 물려 준 것이 다 이런 때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현대전자 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몽준 신당설이 터져 나오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쪽이 삼성을 비롯한 재벌 그룹이다.


신당설에 여권은 '반색', 야당은 '비아냥'




문제는 신당의 필요 충분 조건으로 떠오른 박근혜 부총재의 생각이다. 신당이 출범하려면 박부총재가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현재 3김 대통합을 꿈꾸고 있다. 지역 감정 해소를 위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3김이 합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당이 과연 3김 통합으로까지 이어지느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 여부가 박부총재 거취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부총재의 한 측근은 "박부총재는 3김 통합과 함께 민주화 세력과 근대화 세력의 화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박부총재가 개혁 신당과 영남 신당을 하나로 묶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차기 대선의 변수로 떠오른 영남 신당에 대해 여야의 셈법은 제각각이다.


여권 핵심부는 일단 손해볼 것 없다는 반응이다. 사실 청와대나 동교동계는 영남 신당 출현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한나라당 표를 분산시켜도 좋고, 막판에 여권에 합류해도 나쁠 것 없다는 계산이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신당설이 너무 일찍 나와 불발로 끝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분위기다.


이런 구도는 요즘 동교동계가 설파하고 있는 제3후보론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제3후보론은 당장 제3 후보가 있다기보다 아직 여권의 대선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권의 대선 주자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회창 총재를 제외한 야권의 대선 예비 주자들을 유혹할 최상의 카드다. 즉 여권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정치권 새 판짜기와 관련 있는 것이다. 이번 신당설의 한복판에 있는 박근혜 부총재·김덕룡 의원·정몽준 의원에게는 제3후보론이 향후 행보의 주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권 내부에서도 영남 주자들은 영남신당설이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영남후보론을 앞세워 한껏 주가를 높이려는 이들 처지에서는 몸값이 떨어지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김중권 대표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얘기라고 했고, 그의 한 측근은 "과거 1인 주자들의 정치 실험은 무참한 결과를 낳았다"라고 신당설을 깎아 내렸다. '정몽준 의원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고 의원 한 명 거느리지 않은 독불장군이다. 그가 창당 기치를 드는 순간 현대는 무너질 것이다' '박근혜 부총재의 인기는 주류인 이회창 총재에 대한 견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가 이총재를 떠나는 순간 거품은 곧 꺼질 것이다'는 것이 여권내 영남 주자들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신당설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재벌의 아들과 전직 대통령의 딸이 모여 무얼 하자는 것인가' '창당할 돈이 있으면 위기에 빠진 현대 부채부터 갚는 게 좋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회창 총재 진영은 특히 박부총재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박부총재가 실리·명분 면에서 당을 떠날 이유가 없다. 만에 하나 박부총재가 신당에 합류한다면 그 파괴력이 만만치 않은 만큼 지도부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이다"라고 경계했다.


영남 신당이든 개혁 신당이든 당장은 신당 출현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해 당사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데다 대선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야 지지율이 계속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기존 정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균열이 발생하면, 신당이 출현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지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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