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총리 후임은 이종찬?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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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정치력 · 보수 흡인력 커 '물망'…
야당 반대 거세 '설'로 끝날 수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는 정치권에서도 곧잘 쓰인다. 잊힌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물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거나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 직을 사퇴한 후에는 이종찬 전 의원의 정중동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씨는 지난 6월부터 DJ 총재직 사퇴를 주장해온 인물. 당시만 해도 DJ 총재직 사퇴 주장은 여권 내에서 '보안법'에 저촉되는 발언이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내 충성파 의원들은 이씨를 격하게 성토했고 심지어 이씨가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쪽으로 가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씨가 건의한 대로 DJ가 민주당 총재 직을 사퇴하면서 이씨의 '누명'은 벗겨진 셈이다.




자연히 이번에 DJ가 결단하는 과정에서 이씨가 어떤 역할을 한 것 아니냐, 사퇴 이후 정국에서 이씨가 중책을 맡는 것 아니냐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DJ가 총재직 사퇴를 결정하기 전에 이씨를 불러 의견을 들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씨는 "그 문제로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으나 청와대 인사들에게 소신을 얘기했다"라고 밝혔다. 이씨는 쇄신 파동으로 민주당이 크게 흔들리던 상황에서 몇몇 청와대 인사들을 만나 "쇄신파가 주장하는 인적 쇄신 문제는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남은 것은 대통령의 결단뿐이다"라며 DJ 총재직 사퇴를 건의했다. 청와대의 한 인사도, 이씨의 의견이 여러 경로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으로 안다며 이씨의 말을 뒷받침했다.


"다음 대통령은 DJ를 국가 자산으로 선용하라"


이씨는 DJ가 총재 직을 사퇴한 후 "만시지탄이기는 하지만 이제 DJ가 새로운 길을 열었다"라면서 '성공한 대통령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등 자신의 주장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특히 이씨가 강조하는 것은 'DJ 국가 자산론'이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DJ를 국가 자산으로 선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국제적 명성을 바탕으로 남아공에 대한 경제 금수 조처 해제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씨는 얼마 전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DJ를 중심으로 모이고 DJ의 주도력이 돋보였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청와대의 한 인사 역시 DJ는 이제 정파를 초월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퇴임 후에는 동북아 평화와 협력에 기여하는 국제적 지도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청와대 분위기라며 이씨의 주장에 공감을 나타냈다.




최근 이씨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또 다른 주제는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이다. 박정희 정권 이후 4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수출입국 전략은 이제 시대 상황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동북아 물류 중심국 전략으로 방향을 새로이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DJ 정권은 임기 말 마무리를 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 전략의 방향을 잡아 이를 차기 정권에 이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씨는 그동안 남덕우 전 부총리 등 몇몇 인사들과 국가 전략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네덜란드와 싱가포르를 방문해 강소국(强小國) 발전 모델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지난 3월 DJ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뉴욕에서 만나 DJ가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해운회사 사장을 했던 경력까지 상기시키며 '동북아 물류 국가론'을 건의했다. 9월에는 그동안 가다듬어 온 구상을 정리해 남덕우씨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DJ에게 브리핑하기도 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최근 정가에는 '이종찬 국무총리설'도 나오고 있다. 연말 개각에서 임기말 내각의 총리로 이씨가 기용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DJ의 의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DJ와 가까운 원로 및 중진 인사들이 DJ에게 이씨를 총리 후보로 추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찬 총리설의 논리는 이렇다. DJ가 임기를 1년 4개월 앞두고 초당 정치를 선언한 지금의 상황은 과거 정권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실험이다. 그럴수록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구색 맞추기에 치우쳐 관리형 중립 내각을 짜면 약체 정부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씨의 경우 풍부한 국정 경험과 유연한 정치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 DJ 정권에 등을 돌렸던 보수적인 여론 주도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임기 말 국정을 이끌어 가는 데 적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종찬 총리설에 회의적이다. DJ가 초당 정치를 결심했고 한나라당이 중립 내각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정치인 출신인 데다 언론 문건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이씨를 총리로 기용하는 것은 총재 직을 사퇴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반대가 불을 보듯 뻔한데 무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점도 이종찬 총리설의 가능성을 끌어내리고 있다.


차기 주자 상대로 '국가 발전 전략' 세일즈 계획


실제 한나라당은 이종찬 총리설이 나오자 즉각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이씨가 총리로 기용될 경우 실세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고, 이씨의 광범한 인맥을 감안할 때 우리 사회 여론 주도층 중 보수적 인사들이 DJ 정권에 호의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우려했다. 한때 이씨가 차기 대권에 뜻을 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총리라는 자리가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한나라당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최근 국회 예결위에서 1999년 언론 문건 사건을 들추며 이종찬 총리설을 공격하는 등 벌써부터 견제에 나섰다.


현재 분위기로 본다면 DJ가 이회창 총재를 설득하겠다는 큰 결심을 하지 않는 한 이종찬 총리설은 '설'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씨는 총리를 맡게 되든 아니든 DJ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공을 들인 새로운 국가 전략 구상도 정리가 끝났기 때문에 차기 대선 주자들을 상대로 세일즈에 나서겠다는 계획도 내비쳤다. DJ에게 다시 중용되든 차기 대선 주자의 두뇌 역할을 하든 이씨가 내년에도 국외자로 조용히 지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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