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퍼스트 레이디 깊어지는 침묵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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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조카·측근 잇달아 수난…공식 행사 대폭 줄여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요즘 몹시 심란해 한다는 소식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는 전언도 있다. 조카 이형택씨가 연루된 비리 사건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2월1일 구속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 중 최초의 구속자가 처가 쪽에서 나온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 김대통령은 예전 옥중 편지에서 이여사를 이렇게 불렀다. 이 표현은 부부 사이의 인사 치레만은 아니었다. 결혼 전 이여사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서울의 중산층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외국 유학을 다녀왔고, 처녀 시절 YWCA연합회 총무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를 지냈다.



그런 그녀가 1962년, 자식 딸린 홀아비이고 여러 번 낙선한 끝에 겨우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이내 쿠데타로 의원 직을 잃은 ‘정치 신인’ 김대중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DJ를 젊고 유능한 정치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김대중씨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부터 그녀의 고생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DJ와 함께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보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 선언을 주도한 김대중씨가 문익환·안병무 씨 등과 옥살이를 할 때는 박용길·박영숙 씨 등 부인들과 함께 보라색 옷을 지어 입고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김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은 1980년대 초 이여사가 남편의 석방을 위해 5공 세력과 담판을 벌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대통령이 다리를 저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여사도 다리를 약간 전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회고록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 이렇게 썼다.
‘3·1 민주구국 선언으로 투옥된 김대중씨가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이감된 지 한 달쯤 지난 때였다. 매일 병원 출입하랴, 다른 구속자 가족들과 같이 행동하랴, 집안 일 돌보랴, 그 바쁜 생활 속에서 식사도 제때 하기가 어려웠다. 1월 중순부터 갑자기 무릎과 발이 붓고, 손가락이 약간 구부러지며 부은 곳이 생기고 손목도 아파 왔다. 병원에 가서 진찰했더니 영양 부족과 과로로 인한 관절염이라고 한다.’



이여사는 대통령 부인이 된 다음에도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단순히 대통령을 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젊은 시절 여성운동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여성·장애인·노인·어린이 문제 등에 직접 간여했다. 또한 과거 대통령 부인들과 달리 각종 행사장에서 서슴없이 연설을 하기도 했다. 특히 현정부 들어 여성부가 신설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여사가 힘쓴 덕분이라는 평이다.



이여사는 지난 한 해에만 소외 계층 격려 모임에 33회, 여성 관련 행사에 34회, 문화·자선 행사에 18회, 청소년·교육 관련 행사에 9회 참석하는 등 각종 행사에 1백20여 차례 참석했다. 그녀는 지난해 1월,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펄벅 재단으로부터 ‘올해의 여성상’을 받기도 했다.



국민 10명 중 6명 이상 “대통령 부인 잘한다”






이여사는 1998년 취임 직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좀더 적극적인 영부인의 내조가 필요합니다. 국민은 더 이상 전통적인 영부인 역할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김대중씨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분명히 지적할 것입니다.” 그의 이런 다짐은, 1999년 초 옷로비 사건이 터져 잠시 외부 활동을 접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나름으로 잘 지켜져 왔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지난해 초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의한 유형화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 최고은씨는 이여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아하게 단장하고 각종 행사에 보조로 참석하며 소극적 역할을 해왔던 전임자들과 달리 그녀는 소외된 계층의 복지와 정책 감시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최씨에 따르면, 과거 ‘내조형’에 머물렀던 전임자들과 달리, 이여사는 국내 최초의 ‘참여형 퍼스트 레이디’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이여사에게 액운이 하나 둘 찾아들고 있다. 지난해 12월13일에는 ‘이희호 집사’로 통하던 황용배 전 마사회 감사가 구속되었다. 진승현씨로부터 금감원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2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또한 조카인 이형택씨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나라당은 이형택씨의 배후에 이여사가 있지 않느냐는 의문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여사의 ‘잠 못 이루는 밤’도 길어지고 있다.






새해 들어 공식 행사가 대폭 줄어든 점도 이여사의 고민을 간접으로 드러낸다. 지난 1월 초,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장남 김홍일 의원의 간병을 위해 조용히 미국을 다녀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여사가 공식으로 주최한 행사는 대여섯 건 정도에 불과하다. 평소 이여사와 가까운 관계였던 민주당 김희선 의원은 “이선생님은 강한 듯 보이지만 실은 여린 분이어서, 지난 옷로비 사건 때도 많이 위축되었는데 이번에 또 상처를 입으실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김의원은 이여사를 ‘이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여사의 여성운동 후배이다.



이희호 여사. 그녀를 바라보는 국민 감정은 어떨까.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함께 국민 천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5.0%)은 ‘이여사가 현정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응답했고, 10명 중 6명 이상(64.1%)은 ‘이희호 여사가 영부인으로서 활동을 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29.3%).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에 비해 20% 이상 높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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