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나
  • 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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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의 대공세, 별 소득 없어…TK 지역에서는 효과 볼 수도
3월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노무현 캠프에 커다란 종이 가방이 하나 도착했다. 그 안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삐라’가 너덜너덜해진 채 가득 들어 있었다(오른쪽 사진). 강원도 경선이 열린 3월24일 춘천 역과 버스 터미널 주변에 잔뜩 나붙었던 것을 노후보 지지자들이 수거해 보내온 것이다. 노무현 캠프는 이 삐라를 공개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가 당분간 유보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반격도 좋지만, 자칫 노후보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고 우려해서다.




노후보 진영은 이 삐라를 살포한 배후로 이인제 캠프 또는 한나라당을 의심하고 있다. 한때 후보 사퇴를 고심하다 경선에 복귀한 이후보가 작심한 듯 색깔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데다, 한나라당은 그런 이후보의 공세를 활용해 노후보를 공격하는 ‘이이제노(以李制盧)’ 전법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며칠 사이 이후보의 입에서는 ‘좌경화’ ‘계급주의’ ‘전향’ 같은 자극적인 용어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김윤수 공보특보는 심지어 “극렬 노조와 일부 운동권 세력이 노무현 후보를 통해 당을 접수하려 한다는 의혹이 있다”라고도 했다.
이후보가 집중적으로 문제 삼는 대목은 바로 노후보의 재벌정책·국가보안법 폐지론·언론관이다.


이후보는 노후보가 1988년 국회 대정부 질문과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 때 했던 연설을 ‘왼쪽으로 기운’ 대표 사례로 꼽는다. “재벌 총수와 그 일족이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에게 분배하자”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라는 당시 발언이 모두 노동자를 선동하는 ‘무시무시한’ 주장이라는 얘기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노후보가 당론마저 거스르고 ‘폐지’를 주장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공격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좋아할 곳은 평양뿐이다”라는 것이 이후보가 요즘 즐겨 쓰는 표현이다. 그는 또 “정치인은 언론으로부터 핍박받아도 감내해야지, 노후보처럼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후보는 이런 사상 검증의 종합판으로 <중앙일보>가 지난 1월 실시한 국회의원 이념 성향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모든 대선 후보의 분야별 정책에 대해 0(진보)에서 10(보수)까지 점수를 매긴 결과, 노후보가 평균 1.5로 대선 후보는 물론 전체 국회의원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었다는 얘기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이후보 진영 일각에서는 ‘노후보 부친이 6·25 때 부역했다는 얘기도 있다더라’며 슬쩍 의혹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이후보측 공격에 대해 노후보는 과거 발언 가운데 한두 문구만 트집 잡아 사상 검증을 하려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라며 펄쩍 뛴다. 자기의 기본 노선은 중도개혁이고, 대다수 정책 기조가 민주당과 같다는 것이다. 부친의 부역 의혹에 대해서도 그는 “연좌제가 있던 시절에 판사를 했다면 검증이 다 끝난 게 아니냐”라면서, 오히려 이후보의 정책 노선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반격했다(39쪽 표 참조).


이렇듯 두 후보간 이념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민주당 경선은 ‘축제’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고 있다. 오히려 당이 깨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한 분위기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이념 공방이 극에 달했던 3월28일 전주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가시 돋친 설전과 비아냥, 상대방 말 끊기가 계속되면서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두 사람의 색깔 공방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경선 지킴이’를 자처하는 정동영 후보 역시 자기 연설 시간에 두 사람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면서 축제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후보는 당분간 색깔 공세를 멈추지 않을 태세다. 이같은 공세가 ‘급진적이고 불안하다’는 이미지를 조성해 ‘노풍’의 거품을 제거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후보의 한 핵심 참모는 “노무현 돌풍은 본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여론조사 때문에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후보가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치면 금세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보측이 본선에서 보혁 대결이 벌어지면 절대로 민주당이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계 여론조사에서도 ‘노무현 1위’


물론 지금까지는 이후보의 색깔 공세가 그리 먹히지 않는 분위기다. 경남·전북 경선에서 노후보가 내리 1등을 한 것은 색깔 공세가 과거처럼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매일경제>가 최근 기업 최고경영자 1백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후보가 비전 제시·노사관리 능력 등 여러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것도 재계가 ‘노풍’을 그리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러나 보수성이 강한 대구·경북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이후보측도 색깔 공세가 대구·경북 지역을 겨냥한 득표 전략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김중권 후보가 사퇴하면서 노후보에게 쏠릴 가능성이 높아진 대구·경북 표를 색깔론을 통해 최대한 분산하려고 한다는 얘기다. 이후보를 지지하는 전용학 의원은 “대구·경북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이후보가 이길 수 있다”라고 장담했다.


노후보는 예방 주사를 맞는 셈 치자며 애써 느긋한 표정이다. 어차피 본선에서 한나라당이 비슷한 공격을 할 것이 예상되는 만큼 맷집이나 키우자는 것이다. 하지만 캠프 일각에서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마산·전북을 거치면서 표차를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총점 1위 자리를 내준 상태에서 대구·경북과 수도권 경선을 치러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후보는 “기업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정된 과정으로 개혁을 이루겠다” “공식 후보가 되면 모든 정책은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라고 한 발짝 물러서면서 유권자에게 안정감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운동권이 몰려다닌다’는 공격을 받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당분간 튀는 행동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때 정치판을 뒤흔들던 색깔론이 왕년의 명성을 되찾을지, 아니면 그저 흘러간 노래로 잊힐지는 대구·인천·경북 경선이 치러지는 4월 첫 주에 판가름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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