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 해도 나는 서민”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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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귀족 이미지 털어내기 총력전…‘옥탑방 논란’ 등 한계·역풍에 고심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DJ 파괴’라고 일컬어진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양복에 손수건을 꽂는 등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해 유권자들에게 정서적으로 접근하려고 애썼다. 당시 이영일 홍보위원장은 “김총재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국민의 정서를 흔들 수 있는 감성적인 호소이다”라고 말했다.


‘파격 행보’와 ‘정서적 접근’은 최근 서민 이미지를 띄우려고 애쓰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지난해 12월 말 한나라당은 40대 초반인 심준형씨를 총재 홍보특보로 전격 영입했다. 정치권에 낯선 인물인 심씨는 1984년 대우그룹에 입사해 2000년까지 홍보 분야에서만 16년을 근무한 전문가. 특히 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이미지 홍보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 변화 작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심특보는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를 조사해보니 서민과 거리가 멀고, 젊은층과 문화적인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후보가 친재벌·친미주의자 이미지로 비치는 것도 부담스러운 대목이었다. 이후보의 이미지 변화 작업이 본격화한 것은 이른바 ‘빌라 게이트’가 터진 이후부터다. 그가 100평이 넘는 빌라를 두 채나 사용하고 있고, 딸 부부마저 같은 동에 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회창=귀족’ 이미지가 굳어졌다.



서민 행보의 목표는 ‘부동층 공략’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이후보의 ‘서민 행보’는 이런 와중에 집중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후보측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서민들의 생활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대선을 앞둔 ‘이미지 전략’ 가운데 하나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신문방송학)는 <이미지와의 전쟁>이라는 책에서 ‘정치는 이미지 정치로 변한 지 오래이며, 여론은 곧 이미지 게임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이규완 교수(동아대·언론광고학)는 “세상을 지배하려면 이미지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이미지를 바꾸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일관된 정보를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리고 바꾸고자 하는 이미지로 대중 매체에 융단 폭격을 하는 방법이다. 이후보 진영은 현재 돈이 많이 드는 세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
“우리가 재벌 비호 정당이고 내가 귀족이라는 것은 전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동네에서 시장 봐서 점심은 비빔밥, 저녁은 삼겹살로 먹는다.” “신문 배달도 했고 판사 시절에는 버스 타고 다녔다.”



한마디로 차갑고 귀족적인 이회창에서 인간적이고 서민의 아픔을 아는 이회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것이 이후보 진영의 전략적 목표이다. 지난 5월10일 열린 전당대회장 윗자리에 국회의원들을 배제하고 일반 서민을 앉힌 것이나, 대선 후보로서 첫 행보를 환경미화원 체험으로 잡은 것 등은 이를 위한 면밀히 계산된 행보이다.



이후보 참모들은 이러한 이후보의 행보가 단발성이 아니라 대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한다. 다소 시비와 논란이 있더라도 꾸준히 한다면 처음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전당대회장에서 엎드려 절한 정신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귀족 이미지를 바꾸려는 이후보의 서민 행보는 득표 전략상 부동층 공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나라당 전략가들은 이미 고정층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본다. 지금부터는 20% 남짓인 부동층, 특히 30~40대 부동층을 누가 잡느냐가 대선의 승패를 가른다고 판단한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한나라당표의 결속력은 민주당표의 결속력을 앞지르고 있다. 이후보의 서민 행보는 귀족 이미지를 없애는 것과 함께 ‘서민 후보’로 알려진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효과도 있다. 한나라당이 ‘위장 서민의 가면부터 벗어라’는 제목으로 노후보가 40만원대 외제 골프웨어를 입은 사실을 공격한 것이나, 변호사 시절의 소득 축소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한 것도 이런 계산에서다.






냉소적 반응 많자 ‘전략 수정’



그러나 이후보의 행보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냉소적이다. <시사저널>이 5월 16∼17일 수도권 유권자 1천5백25명을 조사한 결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72.4%로 긍정적인 평가(20.8%)를 압도했다. 또 의욕이 너무 앞선 탓인지 곳곳에서 무리수가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5월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 은평구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에서 있었던 ‘빠순이’ 발언이다.



‘빠순이 메모’를 이후보에게 전한 정병국 의원은 “강연하러 가는 차 안에서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모아 이후보에게 주었다. 혹시 질문이 나오면 대답할 때 참고하라고 준 것인데, 학교 입구에서 학생들이 ‘오빠!’ 하며 환호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했던 말이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빠순이가 원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을 일컫는 은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후보는 관훈토론회에서 “내가 실수했다. 요즘 세대와 말을 하려면 그 세대의 생각과 맞춰야 한다고 한 것인데, 그 날 학교로 갈 때 입력을 잘못 받았다”라고 사과해야 했다.



“양복이 두 벌밖에 없다”라는 한인옥 여사의 말이나, ‘농산물 시장을 방문했을 때 이후보가 흙 묻은 오이를 그냥 먹었다’는 보도는 ‘위장 서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당은 ‘진짜 서민들은 오이를 씻어 먹는다’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는 논평을 내고 서민 흉내가 들통났다고 비판했다. ‘오이 논란’에 대해 현장에 있었던 이후보의 한 측근은 “시장 아주머니가 오이를 앞치마에 쓱 닦아 ‘오이 드시고 정치 잘 하세요’ 하며 내밀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먹지, 씻어 달라고 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옥탑방’ 논란은 이후보의 서민 행보가 갖고 있는 한계와 역풍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후보는 5월24일 있었던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옥탑방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한나라당은 지난 4월에 ‘옥탑방 양성화 방안’을 국회에 제출한 적이 있는 만큼, 이후보의 옹색한 답변은 서민들에 대한 이후보의 관심이 너무 ‘그림’에 치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불러들였다.



이렇듯 몇 차례 촌극이 이어지자 한나라당 안에서도 반성이 나오고 있다. 빠순이 발언 이후 한 참모는 ‘젊은층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것은 좋지만 용어 사용에 좀더 신중해야 한다. 비속어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고 품격 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단순한 현장 체험이 아니라 정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대안도 제기되었다.
이후보의 행보에 변화가 예상된다. 참모들은 최근 회의를 갖고 서민 행보는 계속하되 만나는 계층의 폭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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