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만 세면 만사 형통인가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2.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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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힘의 정치’에 안팎 비난 높아…“현안 대응 급급, 정책은 뒷전”



'집권 야당’이라는 소리를 넘어 ‘1당 독재’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근 행태를 빗댄 표현들이다. 특정 검사를 인사 조처하라는 요구에 이어 법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고 방송사 보도 내용에까지 ‘힘’을 행사하자 이런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해도 너무 한다’고 불평하지만 지방 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의 독주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가면 집권하더라도 그 이후가 정말 문제라며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다.


8월31일 아침 9시30분, 국회 본청 146호실에서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김정길 법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관철하기 위해 소집된 자리였다. 이회창 후보와 서청원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크를 잡은 이주영 부총무가 민주당 의원들에게 의장 공관에 감금되어 있는 박관용 국회의장을 ‘구출’하러 갈 의원들의 이름을 불렀다. “김부겸·이한구·김홍신 의원님 앞으로 나와주세요. 김정부·김병호 의원님도 한번 가시죠….” 이름이 불려 의장 공관으로 가기 위해 의총장을 나서던 한 의원이 농담 비슷하게 한마디 던졌다. “앞에서 찍으면 다 가는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집권하더라도 걱정”


한나라당의 현재를 보여주는 데 이처럼 상징적인 말이 없다. 지금 한나라당의 모든 움직임은 ‘병풍’에 집중되어 있다. 원내 1당으로서 정책 개발이나 집권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 따위는 발 붙일 자리가 없다. 의총장에서 만난 한 초선 의원은 답답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강경 분위기가 지배하다 보니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가 싹틀 수밖에 없다. 김정길 법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낸 마당에 전력이 분산될 수 있다는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행정자치위에 소속된 한나라당 의원들은 최근 경찰청을 항의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한나라당에 문서를 건넨 김성동 전 교육평가원장에 대한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내사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여론의 비난을 샀던 검찰청 항의 방문에 이어 경찰청까지 항의 방문을 하려 했던 것이다.


서청원 대표는 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탄핵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은 헌법상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사항이어서 현재 의석 분포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사안이다. 실현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엄포만 놓은 셈이다. MBC에 보낸 ‘신 보도지침’도 당은 지도부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실무자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으나, 밀어붙이기 행태가 일반화한 분위기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런 가운데 당 일각에서는 '병풍' 대응에만 매몰되어 있는 현상황을 비판하며 대선 전략의 큰 틀을 이렇게 가져가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되었다는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어느 정도 예상되어 있었던 상황인데 병풍 문제든 친일 의혹 문제든 무조건 공작이라고만 몰아가면서 답답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의원은 그동안 이후보 주변 사람들이 철저한 검증을 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검증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당이 전면에 나서서 여권의 공세에 맞서고 후보는 정책을 제시하는 등 긍정적인 부분에 주력한다는 후보-당 분리 전략도 애초부터 실현이 어려운 것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어차피 대선을 앞두고 후보와 당이 한 묶음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만큼 불리한 문제가 제기될 경우 이것을 덮을 만한 더 큰 이슈를 던져 국면을 전환해야 하는데 이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회창 주변 ‘예스맨’들이 강경 분위기 주도


그러나 정작 당내 전략가들이 걱정하는 것은 집권 이후이다. 집권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에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할 경우 2004년 총선에서 대대적인 역풍이 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병렬·윤여준 의원 등 경험이 많은 전략가들은 지금부터라도 집권 이후를 대비한 정국 운영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형준 부소장은 “반DJ 구도로 반사 이익을 볼 때는 지났다. 이후보는 자신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정치 보복은 없다는 이후보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권하면 정치 보복을 할 것이라는 이미지가 생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강경하고 오만한 분위기가 한나라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권의 공격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원론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나라당의 행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후보 주변에 포진해 있는 사람과 당 시스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 주변에서는 이후보 주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위’만 쳐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김문수·이재오 의원 등 재선 그룹이 중심이 되어 당의 강경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TK 출신 한 의원은 “당에서 내가 할 역할이 전혀 없다. 지구당에 내려갈 준비나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풍부한 대선 경험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소외된 대신 큰판을 치러본 경험이 없는 원외 인사들이 후보 주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한나라당을 근시안적이고 즉자적인 대응에만 급급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당에 전략 사령부가 없다는 데 있다. 이후보 스스로가 감독·연출·배우를 다 하고 있는 것이다. 후보 직할 참모 조직인 대선기획단과 당 조직의 마찰설이 흘러나오고 당 내부에 벌써부터 자리싸움이 치열하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증거다. 이렇다 보니 현안 중심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한나라당의 ‘힘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힘을 얻는다면 당내에서 비주류의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도 있다. 이미 김원웅 의원은 병풍 수사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당 지도부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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