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색깔 짙게 바르 고’ 외줄 타는 노무현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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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성 강화’로 지지율 올리기 최후 승부수…10월 말까지 성과 못내면 더 큰 위기 맞을 수도
"이제부터는 노무현 특보가 아닌 정치개혁추진위원회(정개추위) 간사로 불러 달라.”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웃음 띤, 그러나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낡은 정치 세력을 교체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 파문을 던졌던 조순형 공동선대위원장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오후의 일이다. 천정배 ‘간사’는 이어 “조위원장의 말은 정권 재창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치 개혁이라는 것인데, 옳은 말이다”라고 말했다. 조순형 의원은 선대위 안에서 ‘노무현식 정치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전위 조직으로 꼽히는 정개추위의 위원장 직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천의원의 첫마디는 정개추위의 위상에 대한 ‘뼈 있는 농담’이다.




조·천 의원 외에도, 정개추위에는 소장 개혁파의 대표 격인 신기남 최고위원이 본부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3명이 노무현 선대위의 전위 기구에 나란히 포진해 있다는 점은 의미 심장하다. 지금까지 노후보를 보좌해온 정동채·문희상·이강래 의원 등 이른바 ‘실무 그룹’이 뒤로 빠지고, 이념성이 강한 ‘급진 개혁파’ 인사들이 새로운 조타수로 나선 것.


외연 넓히는 ‘덧셈’ 대신 ‘뺄셈’ 택해


정개추위는 10월4일 첫 작품으로 ‘씨씨 코리아 건설을 위한 정치 대개조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씨씨’는 ‘clean clear’의 준말이다. 말 뜻 그대로 ‘순수하고 투명한 한국’을 위해 기성 정치를 ‘뜯어고치겠다’는 계획서이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 후보가 택한 최후의 승부수다.


10월은, 찬바람이 불면 노풍이 다시 불 것이라는 말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스스로 지지율 반등을 ‘공약’ 한 달이다. 한화갑 대표도 ‘한 달만 기다려 보자’는 자세로 10월을 맞고 있다. 노무현 후보가 그 사이에 지지율을 10% 이상 끌어올려 최소한 2등으로 올라서지 못한다면, ‘반노파’ 의원의 말처럼 ‘후보는 되었으나 대통령 선거에는 못 나가는 사도세자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노후보는 물론 그의 정적들도 직감하고 있다.


이처럼 다급한 시기인 만큼, 당내 대다수 중도파 의원들은 물론 상당수 친노파 의원들까지도 노후보가 당내 비주류를 향해 손을 내밀 것으로 기대했다.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이른바 ‘덧셈론’이다. 그러나 노후보는 악수를 청하는 대신 주먹 쥐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순간에, ‘현실’ 대신 ‘이상’을 택한 것. 노후보가 덧셈론을 설득하던 김원기 고문 등의 조언을 뿌리치고, 친노파 의원들에게서조차 일명 ‘뺄셈론’으로 비판받던 천정배·신기남 의원 류의 개혁강화론을 취한 이유가 뭘까.


현실적인 이유로는 우선 당내 봉합이 어려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미 34명의 중도 및 반노파 의원(서명 참여는 70여명)들이 정몽준 의원을 염두에 둔 채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놓은 상태다. 이들은 노후보와 사실상 결별 단계에 들어갔다. 이들이 ‘돕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움직이지도 않는’ 상태로 10월 한 달을 보낼 것이라는 것이 노후보측 관측이다. 다시 말해, 노후보 지지율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움직임도 연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그들과의 관계 모색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천정배 의원은 “그들은 이미 변수가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강화론이 이런 당내 상황 때문에 나온 것만은 아니다. 민주당 선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선거 전략가의 진단은 노후보측의 고민과 지향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노후보 지지층은 크게 20~30대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로 나뉜다. 20~30대가 떠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고, 호남 유권자들마저 빠져나가면서 후보교체론이 힘을 받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노후보에게는 10월 한 달이 죽느냐 사느냐를 가름하는 시기다. 호남 유권자들이 노후보를 떠난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당선 가능성이 줄어서다. 그들은 노후보가 지지율을 높이지 않는 한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노후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달 안에 10% 이상 지지율을 올려야 살 수 있는 운명이다.”


노후보가 자칫 소수파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모험을 각오하면서 개혁강화론이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시일 안에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20~30대 사이에서 노풍을 재점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개혁성을 강화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노후보측은 이들이 떠난 가장 큰 이유가 김영삼 전 대통령 방문 등 노후보의 ‘어정쩡한 자세’ 때문이었다고 본다. 역풍을 각오하고 자민련과의 선을 분명하게 긋기 시작한 것이나, 정몽준 의원의 정체성 의혹을 제기하는 것 등이 모두 이 때문이다. 20~30대의 지지율만 회복된다면, 호남 등 전통적인 지지층의 복원은 보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노후보측의 판단이다.


노후보측은 표면적으로는 ‘10월 처방’의 결과에 낙관적이다. 천정배 의원은 “결국 대선 판도는 ‘노·창 대결’로 정리될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선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이호웅 의원도 “탈당을 결행할 수 있는 의원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할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노사모 홈페이지 등에도 지지자들의 찬성 의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노사모당 하겠다는 거냐” 비판 받기도


그러나 장밋빛 전망이 현실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캠프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선대위 관계자들 스스로 ‘모험’이라고 인정하고 있듯이, ‘선명성 강화=지지율 제고’라는 설정은 어디까지나 공식일 뿐이다. 친노파 안에서조차 ‘이념 정당 하자는 거냐, 민주당 후보를 포기하고 ‘노사모당’ 후보를 하겠다는 거냐’는 식의 비판이 거센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파의 상징인 김근태 의원이 선대위에 불참하면서 ‘꼭 민중당을 하자는 것 같다’(임종석 의원의 전언)는 소감을 남겼다는 점도 아픈 대목이다(34쪽 상자 기사 참조). 이런 의심은 노후보가 정권 재창출보다는 ‘선명 야당’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 이어진다. 후보단일화추진위를 이끌고 있는 김영배 고문은 “그 사람은 개혁만 하고 집권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고, 우리는 집권 먼저 하고 개혁하자는 것이다”라며 노후보를 꼬집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도 노후보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요소다. 개혁성 강화는 필연적으로 ‘보스 정치, 측근 정치, 지역분열 정치에 안주했던 3김식 구태 정치’(조순형 의원)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가고, 이는 탈DJ 강화로 자연스레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호남 민심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역도 성립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10%대 지지율에 머무르고 있는 노후보는 계륵이다. “10월 말이 되어서도 노후보가 2위로 올라서지 못하면, ‘정통성 있는 후보를 밀어야 된다’는 명분이 ‘될 후보를 밀어야 된다’는 현실론에 밀리는 상황이 올 것이다.” 선대위에 핵심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수도권 출신 의원의 진단이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노후보의 외줄 승부수가 성공할 수 있을까.
10월5일, 현정권에 대한 마지막 국정감사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대선 판도를 결정할 10월 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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