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정동영·김근태의 3인3색 ‘대권 행보’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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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가만가만’ 김근태 ‘성큼성큼’ 이해찬 ‘일단 뒤로’
“고개를 외로 꼬던 총리실 직원들이 ‘건강한 긴장’을 느끼기 시작했다.” 총리실 한 관계자는 최근 총리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해찬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새 총리가 임명되면 늘 하던 얘기인데”라며 코방귀를 뀌던 공무원들이 실제로 총리에게 힘이 실리자 한편으로는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가 안팎에서는 때이른 이해찬 대망론까지 나오고 있다. 정책전문가이자 전략가로서 ‘쿨하게 성공한’ 이총리가 경제난 극복, 국정 안정 같은 가시적 성과를 거둘 경우 자연스레 대권 주자 반열에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총리, 킹메이커 역할 다시 맡을 듯

하지만 정작 정가에서는 이해찬 대망론에 그리 무게를 싣지 않는 분위기다. 이총리는 말 그대로 ‘참모형’이지 ‘리더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본인 스스로 대권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총리 지명 때부터 ‘대권에 뜻이 없기 때문에 총리가 된 것’이라고 했던 이총리는 8월13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총리 공관으로 불러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청와대에) 갇혀 사나. 그보다는 (총리로서) 대통령을 끝까지 모시고 싶다”라고 말했다.

최근 공·사석에서 나온 이총리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그는 킹메이커 역할을 다시 한번 해볼 요량인 듯하다. 8월10일 총리 공관에서 열린 ‘마당’(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모임) 모임에서는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서 눈길을 끌었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이총리와 정장관은 지난 5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 때 정장관이 이총리의 경쟁자로 나선 천정배 현 원내대표를 지지하는 등 몇 차례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1996년 정장관이 이총리 추천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인연에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을 함께 만들었다는 동지 의식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알려진 것보다 끈끈한 편이다.

이처럼 세종로쪽 기류가 마뜩치 않게 돌아가자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측은 내심 불쾌한 기색이다(총리실과 통일부는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들어 있고, 보건복지부는 과천 청사에 따로 떨어져 있다). 통일부장관 경쟁에서 밀린 데 이어 팀제 개편에서도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외교·안보 분야는 확실하게 정동영 체제로 자리가 잡히는 데 반해, 사회·문화 분야는 아직 교통정리가 덜 끝난 상태다. 게다가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에 대한 노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하다는 이유로 김장관의 입지는 더욱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김장관은 이런 불리한 국면을 오히려 ‘공격 경영’으로 돌파하겠다는 기조다.

김장관의 외곽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정치연구회와 한반도재단은 최근 잇달아 모임을 갖고 조직 추스르기에 나섰다. 김장관을 성공한 장관으로 만들기 위해 정무적 뒷받침을 하는 것은 물론 ‘친 김근태’ 세력을 곳곳에서 넓혀 가자는 포석이다.

재야 출신 모임인 국민정치연구회는 8월 초 충북 제천에서 2박3일 동안 정기총회를 열어 새 이사장에 장영달 의원, 지도위원회 의장에 이호웅 의원을 선출했다. 현역 의원 10여 명을 포함해 1백50여 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참석자들은 ‘정통 민주세력으로서 역할을 극대화해야 한다’ ‘각종 현안과 당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자’고 뜻을 모았다.

한반도재단 역시 8월28일 수련회를 열 예정이다. 예전에는 가족을 동반한 야유회 성격을 띠었지만, 이번에는 전국의 핵심 일꾼 100여 명이 모여 향후 역할에 관한 진지한 토론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반도재단과 관련해서는 두 달 전 새로 취임한 문용식 사무국장의 움직임이 가장 눈에 띈다. 민청학련 출신으로 김장관이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문국장은 ‘천시(天時)가 김장관에게 있다’면서 10년 넘게 밥벌이를 해온 인터넷 사업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김근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김장관, ‘리얼GT 플랜’ 세우고 공세적 활동

문국장의 가세로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터넷 전략이다. 문국장은 그간의 사업 경험을 토대로 조만간 김장관을 인터넷 최고 스타로 만들겠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김장관은 이미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몇 안 되는 블로그 운영자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개혁당 출신들의 움직임이다. 개혁당 온라인위원장을 지낸 문국장은 개혁당 출신들이 통째로 김근태 지지자가 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작업’을 진행할 태세다.

주변 조직을 추스르는 것과 함께 김장관은 ‘결단력 부족’ ‘순발력 부족’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파격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8월13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항의 편지를 개인 명의로 보낸 것은 ‘할말은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연예인과 어우러지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거나 장관이 직접 국민연금 홍보 CF에 출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진지하고 지루한 것’으로만 알려진 이미지를 가볍고 재기발랄한 쪽으로 바꾸어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정장관은 천장을 찍고 내려오는 추세지만, 김장관은 1%에서 올라가는 추세라고 분석한 그의 한 참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격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뉴DJ 플랜’을 가동했지만, 김장관은 ‘리얼GT 플랜’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제대로 알리면 승산이 있다”라고 세부 전략까지 제시했다.

이처럼 김장관쪽 움직임이 활발한 데 반해, 정동영 장관 쪽은 의외로 조용한 편이다. 정장관의 당내 우군인 천-신-정 연대는 오히려 금이 가는 조짐이고(상자 기사 참조), 민병두·김현미·전병헌 의원 등 친 정동영계 초선들을 보강하고 이강래 의원을 새 회장으로 뽑은 ‘바른정치모임’은 당원 자격 완화를 골자로 하는 당헌·당규 개정을 놓고 개혁당 출신 당원들과 각을 세우고 있다.

당쪽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정장관은 일단 통일부 업무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평소 ‘대중성은 뛰어난데,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온 터라, 장관 업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만이 이를 불식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판단에서다.

정장관, 남북회담 등 챙기며 방미 준비 주력

정장관은 장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특유의 몽골 기병식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남북 장관급회담을 준비하던 7월 한 달간 그는 남북 관계 전문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과외 공부’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재규·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등이 그가 찾아간 전문가들이다. 빠른 업무 파악을 위해 매일같이 삼청동 남북회담 사무국에 출근해 간부들과 토론을 벌였고, 1차부터 14차까지 장관급회담 회의록을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여다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외교·안보 업무를 총괄하게 되리라는 언질을 받은 후에는 윤광웅 국방부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등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협조를 구했다. 정장관의 행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공무원과 언론들은 정장관이 국가안보자문회의(NSC) 상임위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청와대 발표가 나고서야 그 의미를 알아챘다.

통일부 한 관계자는 “정장관이 개성공단 사업단이 아직 정식 출범하지 않아 직원 2명만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 30분도 안되어 부처 인력 7명을 차출해 팀을 보강했다. 과거 같으면 공문을 주고받으며 열흘이 지났을 일을 장관이 발로 뛰며 반나절에 해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장관은 통일부 직원들에게도 직접 국회 등을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남북 장관급회담이 무산된 후 정장관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대목은 8월 말, 9월 초로 예정된 미국 방문이다. 통일부장관의 방미는 매년 이맘때쯤 연례 행사로 잡혀 있지만, 정장관은 이번 기회를 북핵 협상을 진전시키는 중요 계기로 삼으려 한다. 정장관이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와 참모들과 미국 일정과 의제를 가다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김일성 전 주석 조문과 탈북자 입국 허용 문제 등으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데다, 미국 정가도 대선을 앞두고 뒤숭숭한 터여서 정장관이 이번 방미 중에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좋은 입지에서 한 발짝 앞서가고 있는 정동영 장관, 출발은 다소 불안했지만 가속도를 내고 있는 김근태 장관, 여기에 페이스메이커인지 다크호스인지 모를 이해찬 총리가 가세하면서 여권의 차기 구도는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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