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박근혜 '국보법 대결' 손익계산서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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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파동 손익계산서/박, 초반 전투 유리…노, ‘박대표=수구’ 큰 소득
이인제 정몽준 이회창 최병렬 정균환 박상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과 맞대결했다가 패배의 쓴맛을 본 정치인들이다. 정가 안팎에서는 이 명단에 앞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포함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과 모든 것을 걸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겠다고 선언한 박근혜 대표 사이의 기 싸움에서 일단 승기는 박대표가 잡았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국보법 개정 대 폐지가 6 대 3(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9월8일자 조사) 또는 5.5 대 3.5(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 9월11일자 조사)로 나타나 박대표와 한나라당의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노대통령과 확실하게 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박대표는 부수적인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 지난 8월 의원 연찬회를 계기로 절정에 다다랐던 당내 주류·비주류 갈등이 수면 아래로 잠복했기 때문이다. 비주류의 한 축인 영남권 중진들은 ‘의원직 사퇴 불사’까지 들먹이며 박대표의 투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9월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깜짝 1인 시위를 한 김용갑 의원은 “국보법 폐지만 막아주면 주류를 적극 지지하겠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등 수도권 3선 3총사가 이끄는 국가발전연구회도 박대표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박대표, 노대통령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박대표의 초반 승세가 궁극적인 승리로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박대표가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평이 나온다. 노대통령이 국보법 승부수를 띄움으로써 박대표의 ‘보수 본색’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대표는 대표 취임 이후 합리적 보수, 건강한 보수, 온정주의 보수 노선을 표방하며 유연한 행보를 선보였다. 당내 보수 강경파에게는 불만거리였지만, 한나라당이 ‘수구’ 이미지에서 벗어나야만 차기 대권을 거머쥘 수 있다는 당 안팎의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박대표의 너른 행보는 여권에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번 국보법 정국을 계기로 박대표가 그간 공들여 쌓아온 합리적 보수 이미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박대표의 대여 투쟁에 힘을 실어주는 보수 원로들의 대규모 시국선언이나 당내 보수 강경파의 잦은 미디어 노출이 갈수록 박대표를 수구 세력의 상징으로 묶어놓는 족쇄 구실을 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회창씨가 여론조사에서는 늘 1등을 달리다가도 기득권 안주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해 실패했는데, 박대표가 그 전철을 밟는 조짐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노대통령이 쾌재를 부르고만 있을 형국은 아닌 듯싶다. 지지 세력을 재결집하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노대통령 역시 ‘국보법 드라이브’를 거는 동안 잃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치명적인 대목은 ‘경제는 안중에도 없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대통령은 “서민들이 내수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한국 경제 전체가 위기라고 할 만큼 나쁘지는 않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느끼는 경제 심리가 최악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여론은 노대통령의 개혁 추동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편이다.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한사연)가 펴낸 <동향과 분석> 9월10일자는 이런 여론의 속내를 잘 드러내준다.

한사연이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TN소프레스에 의뢰해 9월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7백명 가운데 국가보안법이 부정적이라고 평가한 사람은 49.0%로, 긍정적이라는 평가 44.1%보다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보법 폐지냐 개정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폐지하자(32.0%)보다 개정하자(62.1%)는 의견이 두 배 가량 많았다. 그 이유는 바로 안보 불안감과 경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경우 안보가 불안해지는가?’라는 질문에 ‘좌경 친북 세력이 많아질 것이므로 불안하다’는 응답이 56.3%로, ‘북한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불안하지 않다’는 응답(40.2%)보다 훨씬 높았다. 정부·여당의 국가보안법 처리 방식과 시기에 대해서도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훨씬 많다(아래 표 참조).

요컨대 국보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목숨을 걸 때가 아니니 적당히 고치고 넘어가자는 의견이 대세인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보수 진영이 ‘대통령이 경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이념 투쟁에만 몰두한다’고 몰아붙이는 것도 이런 여론의 흐름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대통령이나 박대표나 전투 초반에 득점과 실점 포인트가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따내면서 장기적으로는 자기에게 돌아올 상처를 최소화하는 것. 이런 효율적인 여론 관리를 누가 해내느냐에 따라 박대표가 노대통령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될지, 노대통령을 극복한 최초의 거물급 정치인이 될지가 판가름 난다. 열린우리당이 서둘러 민생 경제도 챙기겠다며 노대통령을 엄호하고 나선 것이나, 한나라당이 원내외 투쟁을 병행하며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서는 것이 다 그런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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