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비행 위한 숨 고르기인가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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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주자감 1위’ 고 건 전총리가 사는 법/침묵 지키며 독서 등으로 소일
고건 전 총리는 퇴임 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대중 앞에 나서기를 피하고 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곧바로 입을 여는 것은 구설의 빌미만 된다며 강연이나 인터뷰를 사절하고 있다. 최근 그의 인기가 상종가를 치면서 인터뷰 요청이 늘었지만, 그의 답은 한결같다. 그렇다고 그를 만나는 것조차 원천 봉쇄된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차 한잔 마시자’는 요청까지 거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2월8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사무실에서 만난 고 전총리는 ‘지지고 볶는’ 정치권이 마치 남의 나라 일인 양 무척 평온해 보였다. 5평 남짓한 사무실의 한쪽에는 온갖 책이 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최근 그가 읽고 있는 <일류 국가의 길> <넥스트 소사이어티> 같은 책과 외국 잡지가 수북했다. 그가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뉴스 위크>와 <타임> 기사를 펼쳐보니 둘 다 북한 정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신문에서 오려 ‘밑줄 좍’ 그어놓은 기사 역시 한·미 관계를 다룬 내용이었다. 요즘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게끔 하는 대목이다.

‘아호’ 만들기 위해 네티즌 설문조사 진행

‘북핵 문제’에 대한 질문을 넌지시 던지자 단박에 ‘노 코멘트’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엇이든 현실 정치와 연관되는 사안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현실 정치에서 떨어져 있는데, 왜 인기가 올라간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요즘 그의 일과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했다. 우선 새벽 5시에 일어나 CNN 뉴스를 들으며 요가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왕복 35분 거리에 있는 성균관대 근처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고 매일 이 곳을 찾는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8시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리랑 TV에서 방송되는 BBC 월드 뉴스를 시청하고, 10시까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잡지를 정독한 후 집 근처에 있는 카페 ‘모차르트’로 ‘출근’한다. 모차르트는 전형적인 동네 다방인데, 여기에서 그는 이세중 변호사, 정문호 전 서울대 보건대학장, 정경균 전 서울대 보건대학장 같은 동네 친구들과 티타임을 갖는다.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사무실에 고씨가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11시쯤. ‘인터뷰 거절’ 같은 전화 용무를 보고 책을 들추다 보면 금세 12시가 된다. 점심은 주변 설렁탕집이나 추어탕집에서 해결하고, 오후 시간은 대부분 책을 읽으며 보낸다. 간혹 손님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횟수가 그리 잦지는 않다.

가능하면 저녁 약속을 안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는 대부분 집에서 하는 편이다. 불가피하게 외식을 하더라도 술은 최대한 자제한다. ‘괜히 흰소리할까 봐’라는 것이 그가 농반 진반으로 내놓는 이유다.

‘건강’을 위해 그는 하루에 만보 걷기를 꼭 실천하려고 한다. 목욕탕 왕복, 사무실 출퇴근 하면 보통 만보가 되는데, 일이 생겨 차라도 타게 되면 밤늦게 낙산에 올라간다. 주말에 ‘상록 테니스클럽’에 나가 테니스를 즐기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이처럼 그가 소개하는 일과 어디에서도 ‘차기 주자감 1위’의 냄새는 배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마음을 비운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차기 출마를 놓고 그 스스로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끝까지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정치적 행보에 나설 때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고했다.

어찌 보면 이미 길 닦기 작업에 착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강연·인터뷰와 함께 당분간 기고도 안 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최근 그 약속을 깨고 <신동아> 12월호에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글을 썼다. 선친이 한때 동아일보 기자였다는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 글에는 선친에 대한 기억과 함께 자신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이 기고문을 별책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고 있다.

고 전총리가 아호를 마련하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요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가면 네티즌을 상대로 설문조사가 한창이다. 이 연구소 고문인 고 전총리의 아호로 ‘우민(又民:다시 또 백성일 뿐이다)’과 ‘우민(于民:스스로 민초이면서 백성과 함께 한다)’ 중에 어느 것이 나은지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고씨는 “선친이 계실 때는 주저했지만, 주변에서 총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시장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호칭이 애매하다고 해서 아호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又民’에는 백성을 중시한다는 선언적 의미가, ‘于民’에는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실천적 의지가 담겨 있어, 그의 아호 짓기가 던지는 의미는 심상치 않다.

9월 중순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차기 주자감 1위에 오른 고씨에 대한 지지도는 12월10일자 국민일보 조사에 이르기까지 석 달째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위 그래프 참조). 지지층은 지역·연령 별로 고르게 퍼져 있고,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한나라당 지지층에서도 정동영 통일부장관, 박근혜 대표에 이어 각각 2위를 차지해 비토 세력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고 건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의 해석은 엇갈린다. ‘고 건 대망론’에 무게를 싣는 쪽에서는 비토층이 얇고, 국민들이 바라는 리더십이 패기와 돌파력에서 경륜과 안정 쪽으로 옮아가는 만큼 고 전총리의 파괴력이 만만치 않으리라고 본다. 이에 반해 ‘고 건 거품론’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고 전총리가 반사 이익을 얻는 것일 뿐, 정당 기반이나 자생력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는 순간 거품이 급속도로 꺼질 것이라고 상반된 견해를 내놓았다.

민주당에서 뜨거운 ‘러브콜’

현재 고 전총리에게 가장 적극적인 쪽은 민주당이다. 차기 주자가 마땅치 않은 민주당으로서는 당이 독자 노선을 가든 열린우리당과 합당을 추진하든 고 건 카드가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고위 인사는 “당 지도부가 이미 두 번 정도 고 전총리측과 접촉한 것으로 안다. 고씨로부터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지만, 느낌이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유종필 민주당 홍보위원장이 고 전총리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최근 한 경제지는 가판에 관련 기사를 썼다가 당사자들 부인해 뺀 일도 있다. 유위원장은 “고 전 총리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내정되었을 때 연지동 사무실로 출근한 적이 있고, 시장 인수위에서 대변인을 한 인연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민주당 사람들은 그렇게만 된다면 고 전총리와 민주당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기는 것 아니냐며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태풍이 될지 거품으로 꺼질지 모를 ‘고 건의 날갯짓’이 시작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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