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대반 격 시작됐다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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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는 크레스트의 ‘SK 침공’을 빌미로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노림수는 분명하다.출자총액제한제와 금융 계열사 의결권 관련 규제를 풀려는 것이다.이를 위해 궤변도 서슴지 않는다
재벌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인가. 크레스트증권의 SK(주) 지분 매집 사건을 계기로 재계의 파상 공세가 노골화하고 있다. 성명서 등으로 직접 정부를 공격하거나 보수 언론을 통한 우회적인 방법으로 대기업 규제 정책 약화를 시도하고 있다.

재계의 주장처럼 크레스트는 SK의 경영권 탈취를 노렸을까. 소버린자산운용의 100% 자회사인 크레스트는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어 SK그룹의 지배 구조에 균열이 가고 SK글로벌 분식 회계 파문으로 SK(주)의 주가가 급락하자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3월26일부터 4월11일까지 열한 차례에 걸쳐 사들인 물량은 1천9백2만8천주. SK(주) 전체 지분의 14.99%이다.

왜 14.99%에서 매집을 멈춘 것일까. 왜 더이상의 추가 매집 계획도 없다고 밝힌 것일까. 그들은 지분율이 15%를 웃돌면 국내 법령에 따라 복잡한 문제가 야기된다는 사실을 알고 행동했다. 한국 최고 법무법인을 통해 외국인투자촉진법과 전기통신사업법 같은 관계 법령을 면밀히 따져본 것으로 알려졌다. 크레스트가 지분을 10% 이상 취득한 시점부터 SK(주)는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되어 출자총액제한 규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현재 상태로도 SK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15% 이상 매집했을 때 전기통신업법에 따라 SK(주)가 가진 SK텔레콤 주식의 의결권이 제한된다는 사실도 숙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4월18일 드러났다. 크레스트가 SK텔레콤의 위상을 변화시킬 의사가 없으며 아울러 SK텔레콤 경영에 관여할 의사도 없음을 명확히 밝힌 보도 자료를 낸 것이다. 14.99%까지 지분을 사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크레스트가 SK텔레콤 경영권까지 노리고 있다는 사이렌을 발동했었다.

크레스트측은 자신들이 수익 창출을 꾀하는 장기 투자자라고 설명했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크레스트가 상당히 호흡이 짧은 투자 펀드라는 상반된 주장도 나온다. 10여 년간 외국계 펀드와 접촉해와 이들의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크레스트는 장기 투자가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에 대한 투자 기록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주로 단타를 해왔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경영권까지 노리지는 않는 것 같지만, 경영권을 위협하는 수준의 지분율을 지렛대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요구를 할 것이 틀림없다.

이미 SK(주) 경영진과 협상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지적했다. 크레스트는 이미 SK(주)에 SK글로벌을 지원하지 말고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기업 사냥꾼으로서의 ‘마각’을 드러낸다면 기업 쪼개 팔기나 그린 메일 등을 강요할 수도 있다.

국내 3위 재벌이 크레스트라는 외국계 펀드의 과녁이 되었다는 사실은 재계에 위기 의식을 불어넣고 있다. 크레스트가 SK 경영진과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호 협력하자고 다짐했다지만, SK가 원치도 않는데 인수되거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엄청난 출혈을 강요당할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지분이 적은 대부분의 재벌 지배 주주로서는 등골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SK가 외국계 펀드의 표적이 된 것이 재계가 주장하듯이 정부의 규제 탓일까. 경제 5단체로 대표되는 재계는 SK건을 빌미로 출자총액제한제 같은 대기업 규제를 풀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재벌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없애겠다고 벼르는 대표적인 규제는 두 가지다. 공정거래법 10조와 11조에 각각 명시된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융 계열사 의결권과 관련한 규제다. 전경련 신종익 규제본부장(상무)은 “출자총액제한제는 국내외 기업간 역차별을 초래하는 대표적 규제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대기업들은 이 규제로 인해 합병·매수 기회가 막혀 있지만,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 외국 기업들은 마음대로 알짜 기업을 인수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도 “SK그룹의 경영권이 위협받는 최근 상황도 따지고 보면 정부가 출자총액제한제를 강화해 기업 활동을 지나치게 제약한 결과이다”라며, 정부가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는커녕 외국 자본의 사냥감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난했다.

보수 언론도 정부 때리기에 가세했다. 국내 기업들이 출자총액제한에 걸려 주식을 사들이기가 어려우며, 심지어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마저 행세할 수 없다면 공정한 경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역차별론을 제기한 4월16일자 〈동아일보〉 사설이 좋은 예다. 이 사설은 외국인이 지배 구조가 취약한 국내 기업을 공격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출자총액제한제가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당연히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대(순환 출자) 잡으려다 초가삼간(기업) 태운다(적대적 M&A)는 〈세계일보〉의 표현은 더욱 자극적이다. 4월 들어 친기업 논객들도 부쩍 신문 지상에 많이 등장했다. 홍익대 선우석호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지면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같이 경영권 방어를 막는 제도들은 주식 헐값 매각을 유도해 주주 이익을 훼손하기도 한다면서 에둘러 재벌 논리를 거들었다.

재계와 일부 언론의 공격은 공정위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공정거래법을 통해 대규모 기업집단이라는 재벌을 규제하는 선봉에 서 있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SK건 이후 부쩍 가팔라진 재계의 파상 공세에 대해 공정위 강철규 위원장은 미동도 하지 않는 뚝심을 보이고 있다. 강위원장은 재계의 논리를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강위원장은 지난 4월16일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조찬 강연에서 SK가 외국계 펀드로부터 공격당한 것은 출자총액제한제 때문이 아니라 후진적인 지배 구조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기업의 순환 출자를 억제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출자총액제한제도는 당분간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쐐기를 박은 것은 물론이다.

공정위 조학국 부위원장도 4월18일 SK의 경영권이 위협받게 된 것은 지배 주주(최태원 회장)의 현금 투입 지분이 0.11%에 불과하고 계열사들이 순환 출자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터에 SK글로벌 사태가 터지자 SK(주)의 주가가 급락한 데 기인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재계가 주장하듯이 계열사간 출자로 경영권을 방어한다면 미봉책일 뿐더러 총수 중심의 왜곡된 소유 구조를 심화해 그룹 전체의 동반 부실을 가져오는 등 부작용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공정위는 재계가 마치 SK그룹의 합병·매수 위험이 출자총액제한제 때문인 것처럼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실상은 그룹 오너가 쥐꼬리 지분으로 계열사를 쥐락펴락한 후진적인 지배 구조 때문이라며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지고 보면 2003년의 출자총액제한제 완화 논쟁은 1998년의 재판이다. 1998년 2월 재벌들의 타도 대상 1호였던 출자총액제한제는 폐지되는 운명에 처했다. 외환 위기 이후 주가가 떨어진 국내 기업들이 적대적 합병·매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재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탓이었다. 그러나 폐지에 따른 폐해는 자못 심각했다. 1998년 17조7천억원에 그쳤던 순환 출자가 2000년 4월 45조9천억원으로 급증한 것이다. 결국 2000년 출자총액제도가 부활되었다. 금감위 이동걸 부위원장은 “당시 진 념 경제팀은 적대적 합병·매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재계의 궤변을 받아들여 기업 개혁에 엄청난 후퇴를 가져왔다”라고 비판했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적대적 합병·매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주장도 궤변에 가깝다. 4월18일 현재 외국인 지분율이 50% 이상인 기업은 국민은행·포스코·삼성화재보험·삼성전자 등이다. 지난해 말 현재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외국인 지분이 국내 최대 주주의 지분보다 많은 기업도 7개에 달한다. 삼성전자·SK텔레콤·국민은행·KT·포스코·현대자동차 등이다. 재계의 주장처럼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기업들이 우량 기업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이 기업들이 적대적 합병·매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까. 외국인 지분율이 60%가 넘는 국민은행의 최범수 부행장은 그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최부행장은 “외국인들은 경영을 잘해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한다. 적대적으로 경영권을 찬탈하려는 외국인 투자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설령 그런 외국계 펀드가 나온다 치더라도 다른 외국인을 동조 세력으로 규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외국인이라고 묶여 불리지만 이들은 투자 행태와 동기 등에서 이해 관계가 다른 투자가들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동걸 부위원장도 “적대적 합병·매수 위협을 물리치는 오직 한 가지 비법은 경영을 잘하는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설사 어떤 기업이 사업 구조는 괜찮은데 경영진이 경영을 잘못해 적대적 세력이 공략한다 해도 그것이 꼭 국민 경제에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 주인이 바뀔 뿐 기업을 외국으로 뜯어갈 수는 없으며, 배당이라는 국부 유출이 일어난다 해도 이 외국계 투자가가 경영을 잘해 기업 가치를 높인다면 모든 주주에게 이익이 되고 경제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크레스트가 SK를 침공함으로써 재계는 확실한 건수를 잡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노림수는 분명해 보인다. 이 참에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폐지하거나 더욱 완화하고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을 부활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이다. 최소한 집단소송제는 받아들이되 앞으로 튀어나올 금융 계열사 분리 청구제를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노무현 정부와 재계의 힘겨루기는 한층 격렬해질 것이다. 2003년도 1998년의 재판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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