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종금 ‘검은 돈’권력 핵심에 흘러갔나
  • 주진우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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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 담당자 “2억5천 전달”…안희정씨 “로비 자금 아니다”
지난 3월17일 법무부 업무 보고를 받는 노무현 대통령은 결연했다. 노대통령은 “내가 수사의 걸림돌이라면”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나라종금 로비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측근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을 먼저 수사함으로써 자신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개혁에 가속도를 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나라종금을 둘러싼 로비 의혹. 그 실체는 무엇이며, 과연 노대통령의 측근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닉스’ ‘보이런던’ ‘겟유스트’ 등 의류 사업을 통해 사세를 확장한 보성그룹 김호준 회장은 1997년 11월17일 나라종금을 인수했다. 그러나 나라종금은 재출범 5일 만에 외환 위기로 인한 대규모 인출 사태를 겪고, 12월10일 1차 영업 정지 조처를 당했다. 1998년 5월 영업을 재개했으나 금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모기업 보성그룹에 무리한 대출을 계속해 같은 해 10월부터는 대출 받아 이자를 갚을 정도로 극심한 자금난에 빠져들었다. 결국 나라종금은 2000년 1월 2차 영업 정지를 당했고, 곧바로 보성그룹도 화의에 들어갔다.

1차 영업 정지 이후 영업을 재개한 나라종금에 투입된 추가 공적자금은 무려 2조1천6백22억원. 누가, 어떤 이유로 부실 종금사의 문을 다시 열게 했고,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했는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라종금이 퇴출을 저지하기 위해 극렬한 로비를 벌였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 불길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국회 공적자금국정조사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조희욱 의원(자민련)은 “청산 기관인 나라종금의 영업을 재개시키고 국책 기관의 자금을 예치한 것은 권력 실세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조의원측은 당시 나라종금의 고문으로 재직한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을 의심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법률 고문으로 있었지만 1999년 말은 옷로비 사건 때문에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로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나라종금 로비 의혹이 다시 눈길을 끈 것은 로비 자금 중 일부가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측근에게 유입되었다는 설이 제기되면서부터였다. 대선 레이스 내내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던 나라종금 의혹은 대선을 사흘 앞둔 2002년 12월15일 불이 붙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에 의해서였다. 그는 “보성그룹의 자금 담당자 최 아무개씨(48)가 노후보 측근 안희정씨와 염동연씨에게 각각 2억원과 5천만원을 로비 자금으로 건넸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이 돈이 노후보에게 전달되었는지 진상을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의원은 “노무현씨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검찰은 뇌물 제공자 명단을 손에 쥐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며 최씨의 검찰 진술조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홍의원이 주장한 대로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과 염동연 전 정무특보에게 나라종금의 돈이 전달된 것일까. 또 이들은 과연 나라종금을 위해 로비를 했을까. 돈 심부름을 했다는 최씨의 진술은 구체적이다. ‘1999년 8월 김 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 노보텔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안씨를 만나 현금 2억원을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주었다. 명함에 생수회사 사장 직함이 찍혀 있어 기억이 났다.’

하지만 당사자인 김호준씨는 안씨와 염씨에게 돈을 보낸 적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 검찰도 김씨가 엘에이디의 회사 자금에서 조성한 비자금 9억1천5백만원의 조성 경위와 용처를 조사했지만 정치권으로 흘러든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대검 중수부 공적자금합동수사반장인 민유태 중수1과장은 “최씨가 비자금의 일부가 정치권에 건네졌다고 진술해 김씨의 계좌 23개 전부에 대해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정치권과 관계된 것을 찾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씨가 보관했다고 주장한 비자금 사용 내역서는 비자금 내역서가 아니라 개인 투자 자금 내역서였고, 비자금을 현금 형태로 운용했기 때문에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법원도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 1월 법원은 “최씨가 23개 계좌를 통해 김호준의 개인 자금 2백30억원 가량을 관리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씨가 김씨의 사용처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김호준씨의 한 핵심 측근은 “안희정씨와 염동연씨에게 돈이 건네진 것은 사실이다”라고 시인했다. 김씨의 동생이자 보성그룹 계열사 닉스의 대표이사인 김효근 사장이 개인적으로 안희정씨의 생수회사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잘 되면 돌려주겠지 하는 식이었다고 했다. 둘은 고려대 운동권 선후배 사이여서 친분이 남달랐으며, 김씨가 생수공장 부지를 답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성그룹은 의류와 생수를 접목해 청바지에 생수를 차고 다니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김씨의 측근은 “돈을 준 곳은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카페였고, 생수회사 사장 명함에 투자금 영수증을 써줘 받았다”라며 정당한 투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염씨가 수자원공사 감사 시절 수뢰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 나오자 김회장이 용돈 차원으로 5천만원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중동고 선배인 염동연 특보를 평소 존경하는 선배로 모셨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안희정씨는 “김호균씨는 대학 1년 선배여서 학창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당시 나는 로비를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더 이상은 확인해줄 수 없다. 적절한 시점이 되면 모든 걸 밝히겠다”라고 말했다. 염동연씨도 안씨와 똑같은 말을 했다. 염씨는 “김호준 회장과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절친한 것은 인정한다. 모든 것은 검찰에서 밝히겠다”라고 했다.

안씨와 염씨가 나라종금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로비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당시는 나라종금 퇴출 움직임이 없었고, 안씨와 염씨는 공무원 신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로비에 나섰을 가능성은 낮다. 수사 과정에서도 이들이 로비했다는 혐의를 찾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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