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실’ 사외이사 경영 관행 확 바꾼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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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지배구조 개선 일등공신…대주주 거수기 노릇은 옛말
국민은행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12명 가운데 8명을 새로 선임했다. 선임 절차도 이전과는 달리 ‘교과서’를 따랐다. 장하성(고려대)·정광선(중앙대) 교수 등 기업 지배 구조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으로부터 후보를 추천받았다. 자문단은 후보 80명을 놓고 능력과 자질을 검증한 뒤 24명을 국민은행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사외이사 3명과 은행장으로 구성된 사외이사추천위원회는 자문단이 추천한 24명을 놓고 토론을 거쳐 12명을 확정했다. 기존 사외이사 가운데서는 출석률이 높고 활동이 활발했던 정문술 미래산업 상담역을 비롯한 4명만 연임시켰다. 남승우 풀무원 대표와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대표 등 다른 회사 경영자 6명과 외국인 2명이 새로 합류했다. 새로 선임된 사외이사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은 ‘한국의 장하성 교수’처럼 미국의 기업 지배 구조 전문가로 꼽히는 스탠퍼드 대학 버나드 블랙 교수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이사회의 독립성과 경영 감시 기능을 높이기 위해 지배 구조 전문가와 외부 경영자를 대거 영입했다”라고 설명했다.

껍데기에 지나지 않던 사외이사가 최근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겉과 속을 다 채운 명실상부한 제도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불투명한 대북 지원과 SK글로벌의 회계 분식 사태를 겪으면서 사외이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 몇몇 기업에서 활동한 선진적인 사외이사들의 성과도 한몫 거들었다.

그동안 많은 기업의 사외이사는 유명무실했지만 몇몇 기업에서는 사외이사들이 제구실을 함으로써 해당 기업의 지배 구조를 크게 개선하고 경쟁력을 높였다. 예컨대 SK텔레콤·현대중공업·S-Oil 등을 꼽을 수 있다. 얼마 전 SK쇼크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지만, 계열사였던 SK텔레콤은 비교적 그 폭풍으로부터 피해를 덜 입었다. 여기에는 지난 5년 동안 지배 구조 개선에 힘썼던 사외이사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남상구 교수(고려대·상경학부)를 비롯한 이 회사 사외이사들은 1998년부터 SK텔레콤이 계열사들에게 ‘물린’ 돈을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그룹 계열사 가운데 제일 잘난 ‘자식’인 SK텔레콤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예금 담보 등을 이용해 가난한 ‘형제사’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계열사에 퍼주다시피 한 돈만 수천억원에 달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사외이사들은 계열사에 대한 부당 지원을 끊으라고 경영진에 끊임없이 요구했다. 회사가 정보나 자료를 제공하지 않을 때에는 사외이사들이 직접 금융기관을 찾아가 거래 내역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외이사끼리만 1주일에 한두 번씩 따로 모여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안을 마련했다. 이들이 따로 모인 횟수만 연간 80회나 되었다.

사외이사들이 끈질기게 채근한 덕에 SK텔레콤은 계열사 지원을 차츰 줄여왔고, 그 결과 이번 사태에서 피해를 덜 보게 되었다. 남상구 교수는 “내가 사외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회사의 지배 구조가 깨끗해지고 경쟁력이 높아져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사외이사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지배 구조를 개선하려고 했던 경영진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남교수는 덧붙였다.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부터 ‘가난한’ 계열사들과 담을 쌓고 일찌감치 지배 구조를 개선할 수 있었던 것도 사외이사들 덕이 크다. 2000년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그리고 두 회사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 분수령이었다. 현대중공업은 1990년대 중반 그룹 결정에 따라 현대전자에 빚 보증을 섰다. 지급 만기일을 앞둔 2000년 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외이사들은 현대그룹 경영진과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현대중공업의 손실을 줄였다. 당시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였던 박진원 변호사는 “그 때까지만 해도 ‘한 식구’라는 명분으로 투자 전략서 한 장 없이 증자를 요구하거나 돈 꾸러 오는 계열사 직원들로 현대중공업 문턱이 닳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현대중공업에 돈 꾸러 오는 일이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그 뒤 현대중공업은 다른 회사에 비해 계열 분리를 서두를 수 있었고, 복잡했던 지배 구조도 정리할 수 있었다.

지배 구조 개선 모범 기업으로 꼽히는 S-Oil 역시 사외이사 제도를 일찍부터 정착시켰다. 전체 이사 16명 가운데 절반이 사외이사이고, 사외이사의 절반은 외국인이다. 이사회 구성원이 많은 데다 외국인까지 있어 이사회를 열기가 힘들 것 같지만, 이사회 평균 참석률은 90% 이상으로 매우 높다. 외국인 사외이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때에는 화상 회의까지 동원한다. 사외이사들끼리 따로 회의를 하고, 회사 경영에 대한 새로운 의견도 수시로 제시하는 등 사외이사 활동도 활발하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아시아 머니>지가 선정하는 국내 경영우수기업 3위, 소액주주 관리 부문 최우수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들의 성과는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와 ‘후보’들까지 변화시켰다. 사외이사 경험이 풍부한 한 인사는 최근 한 기업으로부터 사외이사 직을 제의받았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 회사는 지배 구조가 엉켜 있는 데다 자본 잠식 상태에 빠져 있어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가는 책임만 뒤집어쓸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외이사 ‘후보’들은 과거에는 사외이사 직이라면 무조건 수락하거나 줄까지 대가며 기웃거렸지만, 요즘에는 고르고 고른다. 책임은 안 지고 월급까지 받을 수 있는 유익무해했던 과거와 달리 책임과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자리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 말 소액주주들로부터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삼성전자 임원들에 대한 천억원 가까운 손해 배상 판결이 내려진 사례가 있다(이 소송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더욱이 올해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사외이사를 비롯한 임원의 책임은 더 늘어난다. 그래서 최근에는 임원배상책임보험을 전제 조건으로 사외이사 직을 수락하는 이들도 있다. 임원배상책임보험은 임원들이 물어내야 할 손실을 보험회사가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삼성·LG·SK 계열사 등 전체 기업 열 가운데 셋(28.2%)은 이 보험에 가입했다.

뿐만 아니라 사외이사 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과외’까지 받는 이들도 있다. 한국이사협회와 고려대 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각각 이사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데, 현대중공업·국민은행·LG전자의 사외이사들이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기업 지배 구조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기업 경쟁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지식과 이사들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고려대에서 이 강의를 이수한 이선호 전 수출입은행 전무(전 현대중공업 사외이사)는 “사외이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사외이사 제도의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외환 위기 직후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가 모든 기업에서 정착해 기업들의 지배 구조가 선진화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아직도 많은 기업의 사외이사는 대주주나 경영진이 추천한 사람들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대주주나 사장의 ‘거수기’ 또는 ‘고무 도장’ 노릇만 하고 있다. 상장회사협의회가 지난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참석률은 평균 60.3%, 회사 경영과 관련한 의견 제시 건수는 0.4건이다. 하지만 선두 기업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의 밀알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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