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추월하는 날 웃으리라”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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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20명의 프로토자동차, 스포츠카 ‘스피라’ 제작·수출 성공 비화
프로토를 아십니까?’ 현대·기아·대우·쌍용·삼성 그리고 프로토. 6월13일 건설교통부는 스포츠카 전문 업체인 프로토자동차를 국내 여섯 번째 완성차 제조 업체로 승인했다. 프로토자동차는 1997년 자본금 14억원, 직원 15명으로 출발한 소기업. 지금도 관리 사원 2명을 합해 20명이 직원의 전부인 ‘공방’이 자동차 메이커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프로토자동차가 일을 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였다. 지난해 11월 프로토는 미끈하게 빠진 스포츠카 ‘스피라(Spirra)’를 서울모터쇼에 선보여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스피라의 다이내믹한 외관은 자동차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시속 280㎞,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 도달 시간이 4.6초. 세계 유수의 스포츠카에 전혀 뒤지지 않는 성능이었다. 더구나 자동차 제작의 핵심 기술인 설계와 디자인에서 부품 제작에 이르기까지 주요 공정을 자체 기술로 이루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찬사가 이어졌다.

이때 김사장은 승부수를 던졌다. 정통 스포츠카 생산. 그것은 전직원의 꿈이었다. 그동안 쌓아놓은 기술이 있어 김사장은 성공을 자신했다. 김사장은 “기술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량 경량화를 위한 기술이 있었고 설계 노하우가 있었다. 디자인과 스타일링에 대한 자신감이 스포츠카 개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회의적이었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데 차를 만든다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김사장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우리가 만드는 차가 세계를 활보하도록 만들자”라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신차 개발에 착수했다. ‘철야를 하는 것이 정상인 회사’라는 프로토의 시스템은 이때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직원 절반은 철야를 하고 다음날 나머지가 교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자동차에 미친 사람들은 마냥 행복했다. 허윤재 과장은 “10여 명이 모여서 정통 스포츠카를 만든다고 했더니 ‘장난감 자동차 아니냐’며 다들 비웃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탄생시킨다니 월급을 안 받아도 즐겁고,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열정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대기업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번 돈을 고스란히 스피라 제작에 쏟아부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직원 모두가 눈물을 훔치며 본사 사옥을 매각해 투자비로 충당했지만 직원들의 월급이 6개월이나 밀리기도 했다. 어떤 직원은 사장에게 “꼭 차를 만들어야 하느냐, 그냥 대기업 프로젝트만 진행하면 편히 살 수 있다”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자금 이외에도 장애물은 곳곳에 있었다. 최초로 시도하는 모험이어서 국내에는 벤치마킹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전문 기술자도, 자료도 없었다. 그렇다고 2억원이 넘는 외국산 스포츠카를 몇 대 사서 뜯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적을 뒤지면서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야 했다. 3천여 점에 달하는 모델 스케치를 하고 점토 고형틀을 깎아가며 도면 위의 자동차를 현실로 옮기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사이 자동차 뼈대를 이루는 초경량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을 개발했다.

기본적인 어려움을 뛰어넘자 이번에는 부품 하나하나가 문제였다. 기술력이 있는 부품 회사는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신기술을 개발하고 부품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작지만 의욕 있는 부품 회사를 키워 나갔다. 이러한 집념이 엔진과 변속기를 제외한 스피라 나머지 부품 모두를 국산으로 채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스피라 탄생은, 하루 종일 자동차만 생각하고, 자동차만 생각하면 배가 부른, 자동차에 미친 사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직원 모두가 도를 닦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완성된 스피라의 덮개를 열자 마치 마릴린 먼로가 환풍구 위에서 치마를 날리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고 허윤재 과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김한철 사장의 부인이자 디자인 파트를 맡고 있는 최지선 이사는 “디자인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들을 두루 해봤기 때문에 스포츠카를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든 직원의 꿈이 같았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마케팅 담당 이도형 이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를 직접 만들겠다는 욕심이 스피라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최근 프로토자동차는 스피라 30대를 대당 6만 달러(약 7천2백만원)에 미국으로 수출하기로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7월 초부터 스피라는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 땅을 달리게 된다. 스포츠카 메이커로서 이제 막 시동을 건 프로토자동차의 질주를 지켜보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마치 메이저 리그에 막 진출한 한국의 젊은 야구 선수를 보는 것처럼.지금은 스피라가 굉음을 내며 질주하고 있지만, 탄생 과정은 좁은 논길을 달리는 트랙터처럼 덜덜거리고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1994년 경기도 용인의 야트막한 야산에 자동차꾼들이 하나 둘 모였다. 쌍용자동차 디자인실에서 무쏘를 개발했던 김한철 사장(42)과 최지선 디자인 담당 이사가 주춧돌을 놓았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기술자 10여명이 대기업을 박차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프로토디자인’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고, 완성차 메이커의 신모델 디자인 개발에 뛰어들었다.

1997년 기술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프로토디자인을 프로토자동차로 바꾸었다. 큰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한 용도로 쓰일 자동차를 만드는 분야에서 프로토는 진가를 발휘했다. 1997년 4년간 연구한 끝에 마티즈를 기본 모델로 개발한 전기 자동차는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98년에는 티뷰론을 다시 디자인한 RT-X 모델로 일반인들에게까지 이름을 알렸다. 1999년에는 에쿠우스 차체 길이를 30㎝ 정도 늘리고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전동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최고급 리무진을 만들었다. 2001년에는 청와대 의전용 리무진을 개발하기도 했다.

서서히 가속 페달을 밟던 프로토자동차는 외환 위기를 만나 휘청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역의 90% 가량을 차지하던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내, 프로토는 경영난에 빠졌다. 김한철 사장은 “초등학생 아들이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하는데 피자 한 판 사줄 돈이 없었다. 암담하고 착잡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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