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너 죽고 나 살기’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3.07.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급 과잉으로 ‘적자 수렁’ 못 벗어나…마이크론·인피니온 동맹, 하이닉스와 대혈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생존 게임이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현재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올해 안에 쓰러지는 업체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퇴출 후보는 어디일까.

우선 적자 규모를 살펴보자.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지난 1/4분기 당기순손실 6억 달러(약 7천2백억원)를 기록하며 9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세계 3위인 독일의 인피니온도 1/4분기 당기순손실 2억7천7백만 유로(약 3천억원)로 8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세계 4위인 하이닉스반도체는 1/4분기 당기순손실이 1조1백70억원에 달했다. 세계 1위 업체인 삼성전자만 1/4분기 당기순이익 5천7백억원을 기록했을 뿐이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불황의 주원인은 공급 과잉이다. 세계 컴퓨터 경기가 침체 일로인 데다가 타이완·중국 업체까지 덤핑 가격으로 물량을 내놓으면서 메모리 반도체의 공급량은 수요량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현재 메모리 반도체 가운데 주력 제품인 DDR(더블데이터레이트)의 시장 가격은 얼마 전부터 반등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생산 원가를 밑돌고 있다.



침체 원인이 명확한 만큼 해결책도 분명하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IT 경기가 급반등하거나 고질적인 공급 과잉이 해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 IT 경기 회복은 아직 묘연하다. 따라서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공급량을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쓰러져야 한다는 결론인데, 공급 물량이 적은 업체가 쓰러져서는 효과가 없다. 시장 점유율 10%가 넘는 세계 2∼4위 중 하나가 쓰러져야 공급 과잉이 해소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유력한 퇴출 후보는 하이닉스반도체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출자 전환·채무 유예·신규 대출 등 채권단의 지원책에 힘입어 분투하고 있지만 3개월마다 1조원씩 까먹고 있다. 게다가 미국 상무부가 지난 6월17일 하이닉스에 대해 상계관세 44.71%를 부과한다고 최종 결정해 미국 수출 길이 막히고 말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도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상계관세 예비 판정에서 상계관세율 33%를 결정했다. 7월 안에 확정될 최종 관세율이 33%를 웃돌 것으로 보여 사실상 유럽 수출 길도 막힐 전망이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인피니온은 하이닉스반도체가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자 공동 전선을 형성하며 ‘하이닉스 죽이기’에 나섰다. 지난 5월16일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세계 반도체 컨퍼런스에서 스티브 애플턴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사장과 울리히 슈마허 인피니온 사장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는 하이닉스반도체가 공개 시장에서 매각되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나 인피니온이 하이닉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하이닉스반도체 관계자는 “마이크론과 인피니온은 현금 흐름이나 경영 실적 지표에서 하이닉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가 쓰러지기 전에 아마 이 두 업체 중 하나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지난 1/4분기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지만 자산재평가에 따른 장부상 손실이 전체 손실액의 80%나 된다. 영업손실 규모는 2천1백억원일 뿐이다. 현재 하이닉스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3천3백억원, 보유 현금은 2천2백억원 가량.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올해 4/4분기까지는 버텨낼 수 있다.
현재 어느 업체가 먼저 쓰러질지는 알 수 없지만 올 겨울이면 누군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누군가 쓰러져야 나머지가 살아 남는 생존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