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장볍' 못 넘는 기업, 망한다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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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등 선진국이 환경 규제를 강화해 ‘그린 제품’이 아니면 수출이 불가능할 판이다. ‘환경 경영’만이 한국 기업이 살 길이다.
새상품과 마주할 때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소 김시형 차장은 가위와 망치, 정을 집어든다. 대형 프로젝션 텔레비전의 전선을 자르고, 본체의 플라스틱을 떼어내는가 하면 전기 밥솥을 산산 조각 내기도 한다. 기자가 “검사를 받은 새 제품인데 아깝지 않느냐”라고 말을 건네자, 김차장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하다 못해 제품에 붙은 스티커에서 유해 물질이 나오면 수출이 막힌다”라고 말했다.

김차장은 신제품에서 무작위로 시료를 채취한 뒤 플라즈마 발광 분석기와 엑스레이 분광 분석기를 이용해 유해성을 가린다. 때로는 시료를 녹여 ppm 단위까지 성분을 검사한다.
같은 시각, 삼성전자 디지털 미디어연구소에서는 PCB(전자 기기에 들어가는 회로 기판) 전시와 함께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날 전시에는 ‘Lead-Free(납이 없는) PCB’가 눈에 띄었다. 이 기판은 납 대신 주석·구리·은을 섞은 합금 재료를 사용한다. 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앞으로 ‘납땜’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납이 들어간 제품은 아예 수출하지 못하는 시기가 온다”라고 말했다.

환경 장벽을 무역 장벽으로 이용

삼성전자가 제품의 환경성 평가와 대체 물질 개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국제 환경 규제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유럽연합(EU). 유럽연합은 환경 보호 정착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유럽연합은 현재 4%에 달하는 전기·전자 폐기물 비중(유럽의 도시 폐기물 대비)이 5년 후에는 16∼28%까지 늘어나 심각한 전기·전자 폐기물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대표적인 환경 규제 지침은 폐전기·전자 기기 지침(WEEE)과 유해 화학물질 사용 금지 지침(RoHS)이다. 폐전기전자기기지침(이른바 W트리플E)은, 소비자에게 판매한 전기·전자 장비를 생산자가 회수해 재활용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이다. 2005년 8월부터는 유럽 시장에서 팔리는 전기·전자 제품을 수거해 처리하는 비용을 제조업체가 부담해야 한다. 이 지침에 따르면, 주요 전기·전자 제품 별로 회수해서 재활용하는 비율이 정해졌고, 이를 준수하는 기업의 제품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지침이 적용되는 대상은 광범위하다. 전력 교류 1000V와 직류 1500V 이하에서 사용되는 전기·전자 제품은 이 지침을 지켜야 한다.

유해화학물질사용금지지침은 유럽연합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기·전자 기기에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2006년 7월부터 납·수은·카드뮴·크롬 등 여섯 가지를 함유한 전기·전자 제품은 유럽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적용 대상은 폐전기전자기기지침과 비슷하다.
허 탁 교수(건국대·화학생물공학부)에 따르면, 유럽연합의 규제 정책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다. 환경 규제가 사업장 중심에서 제품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규제 방식도 이전과 차이를 보이는데,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직접 규제하는 방법에서 시장을 통한 통합적인 규제로 바뀌었다.

전기·전자·자동차 업계, 직격탄 맞아

이처럼 환경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은 유럽연합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전자파·방사능과 같은 안전 관련 이슈와 납과 같은 유해 물질 관련 이슈에 민감하다. 또한 연방법과는 별개로, 캘리포니아의 배기 가스 규제법처럼 주 별로 강력한 환경 규제를 실시하려 하고 있다. 중국도 국가경제무역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폐기물 관리 및 재활용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주요 국가들이 환경 장벽을 강화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환경 보호’이다. 그러나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이 명분 뒤에 실리가 숨겨져 있다.
유럽연합이 이러한 환경 지침을 도입하면 유럽연합으로 수출하는 국내 제품은 가격이 높아진다.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하고 대체 물질을 개발하려면 신규 투자가 발생하는데, 그 비용은 판매 가격에 반영된다. VCR를 예로 들어보자. 삼성전자는 VCR 한 품목을 폐전기전자기기지침과 유해화학물질사용금지지침 규제 기준에 맞추는 데만 추가 비용이 1조원 가량 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납 대신 주석·은·구리를 합금한 재료를 사용하는 데만 VCR 1대당 1백86원이 더 드는 것으로 추산한다.

단순히 비용만 상승하는 것이 아니다. 유해 물질 사용 제한 지침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수출이 원천 봉쇄된다. 가전업체와 협력업체들은 대체 물질을 개발하든지 유럽연합으로 수출하는 것을 그만두든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 국가에 환경 장벽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산자부 자료에 따르면, 유럽연합으로 수출하는 품목 가운데 환경 규제 대상이 되는 전기·전자의 비중은 45%, 자동차는 13%를 차지한다. 수출 관련 기업이 6천여 개인데 이 중 95%가 중소기업이다.

자동차 업계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유럽연합은 2005년부터 ‘유로4 배출가스 기준’을 적용한다. 배출가스의 황 성분 함유량을 현재 150ppm에서 50ppm으로 줄여야 한다. 또한 2006년부터는 생산자 재활용 의무화 법안(ELV·End of Life Vehicle)에 따라 자동차 차체의 85%(무게 기준)를 회수해야 한다. 2015년에는 95%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출 차 한 대당 1백50∼2백10 달러씩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유럽은 보행자 친화형 자동차 개발을 의무화해 안전 관련 규제를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보행자 친화형 자동차란 보행자와 충돌했을 때 보행자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자동차이다. 충돌 시험을 해 일정 기준 이하의 상해치가 나와야 한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6월 ‘글로벌 환경 경영’을 선포한 것도 코앞에 닥친 환경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현대자동차는 2010년까지 1조3천억원을 환경 부문에 투자하기로 했다. 정몽구 회장은 “환경 친화적인 차량을 개발하고, 청정 생산 체제를 구축해 2010년까지 환경 분야에서 글로벌 톱 5에 들겠다”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현대자동차는 친환경 생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그린 구매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2004년까지 협력업체 별로 환경 경영 조직을 구성하고, 부품업체의 환경 경영을 평가하는 체제를 도입해 2007년 그린 구매 체제 구축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자동차 기획관리실장 최순철 상무는 “자동차 산업은 2만개 이상의 부품으로 이루어지는 종합 제조 산업이다. 협력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선진국의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환경 친화적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다”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환경 공급망 관리를 시행하면 그 여파가 관련 중소 협력업체에까지 미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허 탁 교수는 “환경 장벽에 대처하는 데는 편법이 있을 수 없다. 부품 공급 사슬을 바꾸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라고 말했다.

초일류 환경 경영 기업 소니의 뼈아픈 과거

경기도 오산에 있는 중소기업 경성디지털은 올해 초부터 환경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소니 캠코더에 들어가는 부품(액정 화면을 연결하는 경첩 부분으로 엄지 손가락 반 크기)을 공급하는 이 회사는 소니와 그린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소니는 부품업체의 환경 기준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환경성을 평가해 80점 이상을 얻지 못하면 거래를 끊는다.
이 회사는 납품할 때마다 카드뮴·납 등 ‘유해 물질 불사용 증명서’를 제출한다. 제품에서 중금속이 기준치 이상 검출되면 책임지겠다는 보증서까지 첨부한다. 부품뿐 아니라 제품의 포장재에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포장재 종이, 사용된 잉크에도 유해 물질이 함유되어서는 안된다. 이 회사는 잉크업체에 유해 물질이 없는 잉크 개발을 의뢰해 그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소니의 그린파트너십 조항은 엄격하다. 에너지·폐기물·종이 절감 계획도 포함되어 있고, 직원들과 협력업체에 대한 환경 교육에 관한 조항도 있다. 환경 담당 책임자가 바뀌면 즉시 소니측에 보고해야 하고, 제조 공정이 바뀌거나 사용하는 약품을 교체할 때도 소니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7월부터 소니는 불시에 전세계 4천여 공급업체에 6백여 명을 파견해 환경 교육과 제품 내 유해 물질 함유 여부를 감사하고 있다.

소니가 포장재 잉크까지 점검할 정도로 협력업체 관리를 강화한 데는 뼈아픈 사연이 있다. 2001년 10월, 소니는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려 네덜란드로 게임기를 대량 수출했다. 그런데 세관 통관 과정에서 카드뮴이 법적 규제 기준인 100ppm을 초과해 1백50만대가 리콜을 당했다. 소니는 문제가 된 부품을 교체하는 데 1천8백억 엔을 쏟아부었고, 매출이 1백30억 엔, 영업 이익이 60억 엔 감소했다.

이후 네덜란드 세관은 소니가 생산한 모든 제품을 검사했고, 이 사실이 유럽연합 소비자 단체들에 알려져 브랜드 가치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를 계기로 소니는 협력업체로부터 공급받는 부품에 환경 규제 대상 물질이 함유되지 않도록 그린 파트너 제도를 만들어 지금은 세계 일류 수준의 환경 경영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니처럼 환경 규제에 대응하지 못해 망신당한 기업은 여럿이다. 1998년 영국의 다이슨 사는 독일과 스위스에 청소기를 수출하려다가 카드뮴 함량 100ppm 이하 규정에 묶여 시장 진출을 포기했다. 1999년 컴팩은 스위스 조달청에 컴퓨터를 납품하려다가 할로겐 물질이 검출되어 5천만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보았다.
소비자 태도가 변한 것도 환경 경영을 앞당기게 하는 큰 요인이다. 선진국의 경우,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스웨덴 소비자 10명 가운데 4명은 상품을 살 때 반드시 환경 친화성 여부를 따진다. 김태용 삼성지구환경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선진국은 친환경성 제품에 대한 선호도와 구매 양태가 거의 차이가 없다. 한국도 이전에는 말로는 친환경 제품을 선호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가격 때문에 구입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점점 그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 처지에서 환경 경영은 유일한 살 길이다. 산업연구원 안기철 연구위원은 한국 기업도 환경 장벽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유해 물질 규제 같은 경우 중소기업은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 대기업과 정부 차원에서 환경 관련 기술과 자금 지원을 시급히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11월11일 서울 강남에 있는 무역센터 코엑스에서 열린 2003 국제 환경 규제 대책 세미나에서 산업자원부 윤교원 기술표준원장은 “이제 대량 생산, 대량 폐기 시대는 끝났다. 우리 기업은 2∼3년 안에 강도 높은 녹색 장벽을 실감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2004년 1월 대기업·중소기업 등 50여 전자업체는 이미지 제고를 위해 공동으로 친환경 경영을 선언할 예정이다. 환경성을 고려하는 것이 바로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징표이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기업의 생존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 환경 경영 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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