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토종 자본 뜨는가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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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사모펀드’ 육성 적극 나서…이헌재 전 장관, 2조~3조 원 펀드 추진
‘대항마’ ‘토종 대형 자본’. 요즘 금융업계가 붙들고 있는 화두이다. 정부가 국내 금융산업에 투자하는 대형 국내 자본을 육성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 12월6일 재경부는 경제장관 간담회의를 마치고 ‘2004년 경제운용 방향’을 발표했다. 이 중 ‘사모주식투자펀드(PEF·Private Equity Fund) 활성화 방안’이 가장 눈에 띄었다.

사모주식투자펀드(사모펀드)는 특정한 소수·고액 투자자로부터 중장기(3∼7년)로 자금을 조달해 주식과 기업 경영권 등에 투자하고, 경영 성과를 개선해 고수익을 추구하는 펀드이다. 정부는 연·기금, 금융기관, 일반 법인의 자본을 결합해 대규모 국내 투자자본이 출연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편하기로 했다. 재경부는 론스타나 뉴브리지 캐피탈 같은 외국의 사모 펀드 제도도 참고하고 있다. 재경부는 “우리금융지주·한투·대투·대우증권 등을 민영화할 때 사모펀드 제도가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부가 국내 토종 자본을 육성하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국내 금융기관이 외국의 대형 사모펀드로 넘어가는 것을 더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외국 자본에 대한 ‘토종 대항마’ 논리이다. 외환 위기 이후 정부는 외자 유치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금융업권 별로 상당 수준의 외국 자본이 진출했다. 2003년 6월 말을 기준으로 할 때, 금융권별 외국계 자본의 시장점유율을 살펴보면, 은행 26.7%, 증권 14.5%. 생보 10.5%를 차지한다. 최근 미국 푸르덴셜그룹이 현투증권을 인수한 것까지 합하면 증권업에서 외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7%까지 올라간다. 외국인의 금융산업 직접 투자액은 1996년 19억 달러에서 2002년 1백4억 달러로 급증했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부실 금융기관을 외국 자본이 잇달아 인수하는 데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 왔다. 선진 금융기법을 전수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외국계 자본이 인수한 금융기관은 기업 금융보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소매 금융에 집중해 왔다. 앞으로 외국계 자본이 인수하는 금융기관이 더 늘어날 경우, 정부의 금융 정책이 더 이상 ‘약발’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었다.

정부가 대형 사모펀드를 육성하는 데는 다양한 투자 수요에 부응할 투자 제도를 마련하자는 목적도 있다. 재경부는 “신뢰성과 전문성을 고루 갖춘 전문 기관이 부족해 국내 투자자들이 대출을 하거나 채권 투자에 치중한다”라고 발표했다. 한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 담당자는 “외국에서는 고액 자산가가 사모펀드에 투자하는 것이 기본처럼 되어 있다. 저금리가 지속되고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 한국 고액 자산가들도 사모펀드에 눈을 돌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모펀드에 대한 논의는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재경부와 금융감독위 사이에 조율도 안된 상황이다. 재경부가 추진하는 사모펀드는 아직까지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한국증권연구원 김형태 부원장은 “외국의 사모펀드는 사적으로 자금을 모아 사적으로 투자한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사모사투펀드’가 적합하다. 투자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고, 공시 의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부원장에 따르면, 국내의 사모 M&A 펀드(기업인수주권투자회사)와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C) 조합은 그 기능은 유사하지만 투자 운용에 규제가 많아 외국의 사모펀드와 차이가 많다. 가령 기업 구조 조정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는 CRC 조합의 경우, 투자 대상이 법적으로 화의·법정관리 기업 등 부실 기업으로 한정되어 있다.
외국의 사모펀드에서 실제 운용을 담당했던 한 금융계 관계자는 “한국도 구조 조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사모펀드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사모펀드와 헤지펀드로 나눌 수 있는데, 둘 사이에 명확한 법적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헤지펀드는 100명 미만의 거액 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아 외국의 조세 회피 지역에 거점을 설치해 자금을 운용하는 펀드이다. 헤지펀드는 세계 각국을 넘나들며 주로 환율과 금리 관련 상품 등에 집중 투자해 ‘고위험, 고수익’ 투자 성향을 보인다. 미국의 사모펀드는 둘로 나뉜다. 론스타와 뉴브리지처럼 부실 기업을 구조 조정하고 이를 되팔아 이익을 얻는 벌처 펀드가 있고, 주로 벤처 기업에 투자해 이익을 실현하는 벤처 펀드가 있다.

이 관계자는 한국에서 사모펀드가 활성화하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우선 국내에는 3년 이상 장기 투자할 투자자가 없었다. 둘째, 사모펀드를 운영하려면 금융은 물론 기업의 경영 노하우에도 밝아야 하는데 국내에는 사모펀드를 운영할 주체가 마땅치 않았다.”

법적·제도적 걸림돌도 있다. 현행 자산운용업법과 신탁업법이 불특정 다수 투자자를 보호하는 공모·신탁 원리에 충실한 법제이기 때문에 사모형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제도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르면, 펀드 등 페이퍼 컴퍼니는 금융기관을 지배할 수 없다. 또 자산운용사를 설립하려면 자본금이 100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금감위 허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사모 전용 자산운용사나 투자대상별 자산운용사를 세우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도 바뀌어야 한다.

연·기금이 사모펀드의 ‘전주’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것도 장애물이다. 투자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연·기금이 위험성이 있는 사모펀드에 뛰어든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연·기금은 1년 단위로 수익성을 평가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중장기 투자 위주인 사모펀드에 참여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미국에서 사모펀드가 활성화한 것은 1978년 사모펀드에 대한 연·기금의 투자 제한을 철폐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연·기금이 자율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연간 5조∼10조 원을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투자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연·기금의 사모펀드 투자 여부는 연·기금이 판단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사모펀드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 청사진이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금융업계는 벌써부터 사모펀드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이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민영화하는 우리금융지주회사를 인수한다는 구상으로 2조∼3조 원 규모의 ‘이헌재 펀드’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에셋은 내년 1/4분기 이내에 새로운 투신사를 인수해 2천억∼3천억 원 규모에 이르는 사모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TB네트워크도 사모펀드 조성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2004년 국내 금융업계에 기관투자자나 고액 자산가의 투자 욕구를 만족시키는 ‘대형 토종 자본’이 출현할지, 재경부와 금융업계의 동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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