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박세용 회장 인사 소동 전말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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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용 인사 소동 전말/몽구•몽헌 투톱 시스템이 ‘내부 갈등’ 요인
‘역시 오너는 황제다.’최근 현대그룹 인사 소동에 대한 한 재벌 그룹 임원의 촌평이다. 인사 소동이란 물론 박세용 구조조정본부장 겸 현대종합상사•현대상선 회장이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전보되었다가 닷새 만에 다시 인천제철 회장으로 ‘강제 이동’된 사실을 일컫는다. 현대그룹 사상 최대 규모의 승진 인사가 단행된 지난해 12월30일 박회장은 언론으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이미 전문 경영인으로서 최고위직이어서 승진은 아니었지만, 주력사인 현대자동차로 ‘영전’했던 것이다. 계열 분리될 자동차 부문의 경쟁력을 높이고 정몽구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총괄 회장을 보좌하기 위한 인사라는 현대측의 설명도 뒤따랐다.

그런 박회장이 왜 갑자기 인천제철로 가게 되었을까. 당초 현대 오너들이 생각한 그의 용도가 불과 닷새 만에 폐기된 것일까. 과연 지난해 12월30일부터 올 1월4일까지 5일 동안 현대가(家)에서는 무슨 말이 오간 것일까.

박회장 인사 번복에 대한 현대측의 공식 설명은 이렇다. 이영일 그룹 PR본부장(부사장)은 “그룹 구조 조정 업무가 지난해 말로 일단락되어 박회장을 자동차에서 일하게 하자는 복안이 있었다. 그런데 연휴 기간에 윗분들이 강원산업과 합병한 후 삼미특수강 인수를 2월까지 끝내야 하는 인천제철에서 박회장이 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시급하다는 것으로 최종 조율된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 대해 다른 기업은 물론 현대 내부에서도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현대의 한 계열사 임원은 “설명이 궁색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이것을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냉소했다. 이 임원은 전보 소식을 듣자마자 이제 박회장은 ‘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해석이 무리가 아닌 것이, 인천제철은 현재 현대 계열에서 분리되고 있어 박회장은 사실상 현대그룹의 최고 경영인 진영에서 탈락한 것이다.

오너와의 갈등설 유력

워낙 재벌가라는 성층권에서 벌어진 사단이어서일까. 박회장이 갑작스레 ‘낙마’한 이유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구구한 억측이 난무할 뿐이다. 오너와의 갈등설과 그룹내 불화설이 대표적. 갈등설은 박회장이 구조 조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형제간 지분이나 계열사 구획 조정 같은 미묘한 사안을 다룰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몽구 회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몽구 회장이 박회장을 마뜩치 않아 했던 것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박회장은 굳이 분류하자면 ‘왕당파’(정주영 명예회장 사람). 정몽헌 회장 계열인 종합상사와 상선 경영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몽헌 회장과 가깝고 몽구 회장과는 별 인연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계는 이번 인사가 몽구 회장 작품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계열사의 한 임원은 “30일 인사의 최종 결정권자는 늘 그렇듯이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이었다. 그런데 몽구 회장이 박회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아버지를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박회장을 자동차에 쓰려던 정명예회장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가부장적 문화가 유독 강한 현대가에서 아버지가 밀어붙이려는 사안을 아들이 반대해 번복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

그룹내 불화설은 이보다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가령 몽구 회장의 고교 후배로 최측근 인사라는 이계안 현대자동차 사장이 박회장이 위에 오는 것을 견제했다거나, MK(몽구 회장의 애칭) 사단 파워 게임의 희생양이라는 분석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측들은 박회장과 이사장의 관계가 좋다는 점 등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사실과 동떨어진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박회장 소동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 재벌가에서 전문 경영인은 소모품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현대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오너와 전문 경영인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오너의 필요에 따라 전문 경영인은 얼마든지 갈아끼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1998년 현대 계열사의 한 사장이 사석에서 금강산 사업을 비판했다가 이 사실이 정명예회장 귀에 들어가 곧장 해임되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왕회장 지분’ 누구에게 넘어갈까

현대의 전문 경영인들이 더욱 처신하기 어려운 점은 또 있다. 후계 구도가 단선적인 다른 재벌과 달리 현대는 형제간 분할 구도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그룹을 5개 소그룹으로 나누어 2003년까지 분리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우선 올 7∼8월께 자동차 부문이 떨어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는 2남인 몽구 회장(장남은 작고)의 영토. 몽구 회장과 똑같이 현대 경영자협의회 회장인 몽헌 회장(5남)은 전자와 건설 부문을 거느리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 3남인 몽근씨는 현대백화점으로 더 잘 알려진 금강개발산업 회장, 7남인 몽윤씨는 현대해상화재 고문, 8남 몽일씨는 현대기업금융 회장을 맡고 있다.

이처럼 현대그룹 경영 체제는 ‘투톱(몽구•몽헌 회장) 시스템’. 누가 왕회장을 이을 것인가 하는 예측이 줄기차게 나도는 것은 아직 후계 구도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열사 임원 사이에 누구는 MK사단이니 누구는 MH 사단이니 하며 줄서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물론 어느 정도 구획 정리는 된 상황이지만 아직 변수는 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금융 부문.

그룹의 캐시카우(자금줄)로 꼽히는 현대중공업은 6남인 정몽준 의원(지분율 8.05%) 몫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대 주주는 정명예회장(11.56%)이다. 정명예회장이 자기의 지분을 몽구•몽헌•몽준 씨 가운데 누구에게 주느냐에 따라 일약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몽구 회장에게 몰아준다면 몽구 회장은 중공업을 거머쥘 뿐 아니라 몽헌 회장 몫으로 알려진 건설과 상선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건설과 상선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각각 7.85%, 0.49%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몽헌 회장에게 주면 그가 중공업을 장악할 뿐더러 건설과 상선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물론 정몽준 의원에게 준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대 주주가 된다. 현대 계열사의 한 임원은 “현대가의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숨도 못 쉬는 것은 창업자이자 가장으로서의 카리스마도 작용하지만, 이처럼 경제적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측면도 크다”라고 주장했다. 금융 부문은 더더구나 무주 공산이다. 물론 현대증권의 최대 주주가 현대상선(16.64 %)이어서 몽헌 회장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현대 사람들은 확실하게 구획 정리가 안된 것으로 본다.

왕회장의 후계자는 누구일까. 자동차부터 속속 계열 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년께는 드러날 공산이 크다. 이와 관련해 현대 계열사의 한 과장은 현대 사람들의 내밀한 정서를 이렇게 표현했다.“전문 경영인들은 촉각을 곤두세울지 몰라도 후계 구도 문제는 우리 같은 말단 부속품과는 어차피 상관없다. 박회장 건 역시 그런 사안이다. 하지만 솔직히 잘했든 못했든 2년 가까이 그룹 구조 조정을 진두 지휘하며 애쓴 사람을 단칼에 베는 것을 보고 씁쓸해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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