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고위 임원의 ‘삼성차의 원죄’ 고백록
  • 정리·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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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고위 임원의 고백/자동차산업 특성 무시, ‘대박’ 노리고 방만한 투자… 경영진, 잘못 인정 않고 ‘남 탓’만
지난 7월13일 오후 삼성그룹의 한 고위 임원을 만났다. 90년대 초부터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해온 그는, 처음으로 언론에 9년 간의 경과를 털어놓았다. 3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삼성의 자동차 진입 비화 △삼성자동차가 실패한 이유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 이후 달라진 상황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극구 꺼려, 익명으로 그의 얘기를 싣는다. <편집자>

내가 삼성에 몸 담은 것은 90년대 초였다. 당시 삼성은 자동차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자동차 전문가들을 스카우트했는데, 나도 끼어 있었다.

나는 먼저 삼성이 갖고 있던 자동차 관련 파일을 검토했다. 그때 발견한 것은, 삼성이 이병철 전 회장 때부터 자동차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꽤나 노력해 왔다는 점이다. 포드·크라이슬러·도요타 등 전세계 유명 자동차 회사치고 만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술 제휴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결과는 항상 신통치 않았다. 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제휴 협상에 나섰으니 될 리가 만무했다. 양측이 나눈 대화는 선문답을 연상시킬 정도였다.한계 깨달은 이병철, 자동차사업 포기

이 때문에 이병철 회장은 말년에 자동차사업 진출을 포기했던 것 같다. 우선 본인이 너무 연로했고, 자동차사업에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고 또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88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뒤, 이건희 회장이 다시 자동차사업 진출을 모색했다. 그룹 주력 계열사인 전자·화학·금융 등을 하나로 묶어 상승 효과를 극대화하는 21세기 주력 사업으로 자동차가 선택된 것이다.

우리는 엄밀한 검토를 거쳐 시나리오를 짰다. 당시 내린 결론은 1조3천억원을 들여 12만대를 생산하고, 그후 상황을 보아 가며 50만대 수준까지 생산 규모를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때의 총 투자비는 3조4천억원 정도. 이것은 물론 공장 부지비·설비비·판매망 구축비·사원 교육비 등이 모두 포함된 비용이었다.

그런 뒤 해외 제휴선을 찾아 나섰다. 수많은 해외 업체와 접촉했는데, 우리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닛산이었다. 당시 닛산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던 데다, 국제적으로 제휴 파트너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우리는 닛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충실한 동료가 되겠다. 지금 우리를 도와주면, 나중에는 우리가 반드시 당신들을 도와주겠다. 그것을 못 믿겠으면, 삼성의 과거 역사를 들추어보면 된다.” 우리는 또 그들에게 “우리가 경쟁 업체보다 30년이나 늦게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만큼, 좋은 차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같은 설득이 먹혀 결국 우리는 세피로(미국명 맥시마) 모델을 받게 되었다. 국내 경쟁 업체 사람들은 이 모델이 용도 폐기된 옛 모델이라고 폄하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94년 4월 닛산과 기술 제휴 계약을 맺을 당시, 세피로는 아직 개발도 덜 끝난 최신 모델이었다.

일부에서는 로열티(기술 사용료)를 문제 삼기도 한다. 닛산에 턱없이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과거 현대가 포드와 기술 제휴를 했을 때, 포드에 지불했던 기술 사용료는 차량 가격의 3%였다. 그런데 삼성은 1.6∼1.9%밖에 안되었고, 생산된 차량을 어떤 나라에 수출해도 상관없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일부 언론은 연구 개발(R&D) 투자비가 적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차사업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신규 업체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독자 개발하려고 하다가는, 첫 차도 만들기 전에 망하고 만다. 초기에는 기술 제휴를 통해 기술을 습득하고, 점차로 연구 개발비를 올리는 것이 경제적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하려다 망한 것이 쌍용자동차 아닌가.

선진국의 경우에는 연구 개발비가 매출액의 7∼8%에 이르고, 도요타는 9%나 된다. 환경·안전·교통 통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연구 개발비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 업체들 간에 전략적 제휴가 늘고 있는 것도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닛산과 제휴한 것도 그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94년에 들어서면서 당초 계획이 모두 무너져내렸다. 닛산과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한 뒤 삼성은 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21세기 기획단’이 만들어졌고, 그룹 사람들이 대거 몰려왔다. 이들은 당초 계획했던 것을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지출 규모를 턱없이 부풀렸다. 95년 3월 삼성자동차(주)가 설립된 뒤 이것이 본격화했다. 초기 생산 규모를 12만대에서 24만대로 늘렸고, 공장 건물을 높이고, 도로를 새로 닦았다. 그 결과 투자 금액이 1조3천억원에서 4조 3천억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삼성 사람들이‘24만대’에 집착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 차종의 생산 라인을 깔아 놓고 일본식 생산 공정을 따를 경우, 2교대 근무에 약간의 잔업만 추가하면 24만대 생산이 가능하다. 그 때문에 24만대가 한 차종을 생산하는 데 가장 적합한 규모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차종과 시장 수급 상황에 따라 다르다. 차종이 고급이고, 시장 수요가 충분하지 않으면 생산 규모와 인력도 당연히 그에 걸맞게 줄여야 한다.

게다가 삼성은 자동차사업에 처음 발을 내디딘 상황이다. 자동차사업은 전자·화학 같은 장치 산업과 달리, 수많은 부품과 사람이 정교하게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품질을 낼 수 있는 시스템 산업이다. 이것을 완전하게 숙달하려면 최소한 5년 정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에는 소규모로 만들고, 여기서 자신감이 생기면 생산량을 늘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삼성의 경영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21세기에 삼성그룹을 먹여 살릴 산업’이라는 거창한 꿈만 믿고 방만하게 투자했던 것이다.
“삼성이 가진 것은 돈뿐, 10조원 쏟아붓겠다”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을 보면 이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부산 공장의 설비비는 5천억∼6천억 원으로,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닛산의 자동화한 특수 설비와 금형 설비 가격이 비쌌지만, 그 나머지는 싸게 들여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대 시설비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지나치게 비싼 공장 땅값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자동차는 공장 부지비로 평당 8만∼18만 원을 들였다. 그런데 삼성은 평당 백만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경위는 이렇다. 당초 부산시(당시 정문화 시장)는 공장 부지 값으로 평당 40만원을 제시했다. 그후 협상을 통해 평당 25만원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시장이 바뀐 뒤 부산시는 평당 60만원을 요구했다. 뻘밭을 공단으로 조성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한푼도 깎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뻘밭을 공단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지반 침하를 막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1m 간격으로 파일을 박고, 평균 4m 높이로 성토했다. 다행히 신호공단 지하 암반층과 표면 사이에는 1∼2m 높이의 모래층이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모래층 위에 있는 흙의 수분만 빠지면 지반 침하가 중단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처럼 비싼 땅에 공장을 세워서 이익을 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언젠가 이건희 회장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로비 자금으로 얼마나 썼을 것 같으냐?”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삼성의 기업 문화를 고려할 때, 뇌물이나 정치 자금을 주고 문제를 풀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간에서 인식하는 것과 달리, 이회장의 베이징 발언(한국 정치는 3류) 이후 김영삼 정권과의 관계도 소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자동차 공장을 부산에 짓고, 높은 비용을 지불한 것이 곧 ‘정치적 비용’이자 ‘진입 비용’이었다고 생각한다.

땅값 이외에 공장 건설비도 필요 이상으로 들었다. 보기 좋게 하려고 공장 건물 높이를 1∼2m씩 높였고, 현관문과 창문도 키웠다. 사원 아파트가 세워졌고, 그 앞에 볼링장·수영장을 지었다. 그 결과 부대 시설비가 공장 설비비의 2배나 되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으로, 현대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부대 설비비가 공장 설비비의 절반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돈을 만졌던 사람들은 단번에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갖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룹을 믿고 “10년간 10조원을 쏟아붓겠다. 그 동안은 흑자 낼 생각이 없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들은 “삼성이 가진 것이 돈밖에 더 있느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자동차사업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처음 계획할 때부터 매출 상한선을 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투자하고, 생산·판매해야 한다. 그렇게 계산해서 도저히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사업이다. 그런데 삼성은 자동차사업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이는 삼성의 기업 문화와 직결되어 있다. 어느 한순간에 대박이 터질 것이라고 믿고 처음부터 거창하게 일을 벌인다. 삼성자동차의 과잉 투자 얘기가 나오면, 다른 경영진은 삼성전자 얘기를 꺼냈다. ‘삼성전자도 10년 동안 빌빌대다가 하루 아침에 벌떡 일어서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삼성자동차가 망한 지금, 삼성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사장단 회의에서 삼성차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IMF 사태가 일어날 줄 알았나요?”라고 반문한다. 삼성이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번에 철저히 잘못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 잘못을 모두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IMF 탓, 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경영 환경이 바뀐 탓, 경쟁 업체와 여론이 삼성을 흔든 탓…. 삼성은 ‘삼성자동차 법정 관리가 삼성그룹 60년사 초유의 수모스런 일’이라면서도, 이번 실패를 통해 얻은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 자동차산업 미래는 없다”

어쨌든 삼성자동차는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으로 갖고 있던 부채를 모두 털 수 있게 되었다.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이 자산 1조원 규모의 단촐한 회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부산 공장의 땅값과 설비비, SM5의 품질, 숙련된 노동자, 판매망을 감안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1조원 정도라면,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은 누가 인수하든 한번 해볼 만하다. 일본 도요타와 혼다의 경우를 보면, 매출액이 투자 금액의 1.2배만 되면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삼성자동차가 1조원 규모의 회사로 탈바꿈한다면, 8만∼10만 대만 만들어 팔아도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그런데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은 24만대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고, 50만대까지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는 부지도 확보한 상태이다. 엄청난 돈을 추가로 쏟아붓지 않더라도, 약간만 손질하면 18만대까지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SM5가 우수하다는 것은 소비자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 빚 때문에 망했는데 빚이 없어졌으니, 이제야말로 한 번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사장단 회의에서 하면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제 다 지난 일인 걸요.”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솔직히 분통이 터진다. 결국 남 좋은 일만 한 셈인데, 이렇게 하려면 무엇하러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사재는 또 왜 출연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제 삼성에 미련이 없다. 세계 시장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일본 차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차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은 전적으로 삼성그룹 경영층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SM5 생산 라인에서 구슬땀을 흘렸던 기능직 사원들은 정말 진주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계 제1의 명차를 만들겠다는 일념에 불타 있었고, SM5를 애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시위 현장에서도 그들은 ‘현대·대우가 똑같은 차를 만들 수 있느냐?’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삼성은 이들을 배반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국내 자동차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과잉 생산’ ‘규모의 경제’를 들먹인다. 그렇지만 나는 국내 자동차산업의 진짜 문제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포니가 미국에 수출되기 시작한 지 13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국산차의 품질은 솔직히 형편없다. 언제까지 저가 메리트에 의존한 수출을 할 것인가. 내수 시장만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관세 장벽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외제 차들에게 시장을 내주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국내 업체들이 이를 막을 만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의 자동차산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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