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인수 앞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표정
  • 부산·박병출 주재기자 ()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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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노자동차가 삼성자동차 인수 의향서에 조인한 4월27일부터 계산하면 석 달이 조금 더 지났다. 빅딜 무산과 회사정리절차 개시 등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해 다시 백일(百日)을 맞은 삼성자동차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을숙도를 징검다리 삼아 길게 뻗은 낙동강 하구언으로 부산 도심을 벗어나면, 길은 잠시 왼쪽으로 허리를 틀었다가 펴지며 바다로 나아간다. 탁 트인 남해와 뭍을 갈라놓는 이 길의 오른편이 삼성자동차가 자리잡은 녹산·신호 공단이다. 물위에 뜬 듯 펼쳐진 3백만 평 규모의 공단은 드문드문 갈대를 인 채 한산하다. 신호대교를 건너 삼성자동차에 닿을 때까지, 길마저 텅 비었다.

삼성자동차 부산공장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문 앞 전관부터, 불이 켜진 사무실보다 꺼진 사무실이 훨씬 많다. 어쩌다 불이 켜진 곳도 겨우 서너 명씩만 책상을 지키고 있을 뿐 열에 예닐곱은 빈자리다.

“지금은 할 말도, 보여 줄 것도 없다. 8월 말까지는 과도기여서, 그때가 지나야 구체적인 ‘무엇’이 드러날 것이다.” 삼성자동차의 한 임원은 “공식으로 밝힐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지금의 ‘공식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삼성차의 미묘한 처지에서 말미암은 듯했다.

삼성차는 지금 운전자 없이 굴러가고 있다. 삼성은 이미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르노 사는 이제 겨우 인수의향서에 서명만 했을 따름이다. 굳이 따지자면 채권단이 주인인 셈이다. 따라서 경영진은 채권단의 의사에 따르면서 ‘원 주인’인 삼성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 미묘한 사안은 르노 사에도 ‘통보’한다. 그나마 르노 사는 아직 인수 조건에 대해 채권단과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모든 일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경 견뎌낸 ‘남은 절반’들 의욕 충천

그러나 생산 현장은 경영층과는 또 다른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올해 들어 매월 판매 대수가 눈에 띄게 늘면서, 직원들은 행여 작업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라도 저질러 어렵게 되살아난 SM5의 앞길에 흠집을 내는 일이 생길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생산 라인에 매달려 있다. 삼성차가 아래로부터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SM5 판매 대수는 지난 1월 5백여 대에서 2월 9백 대, 4월 1천4백 대, 6월 2천5백대로 늘었다. 판매 대수 자체는 미미하지만, 단 한 차례도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 월 80%에 달하는 신장세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성과이다. 직원들은 삼성차의 품질에 대한 평가가 자리잡아 가는 증거라며 무척 고무되어 있다. 생산부 이종덕 부장은 ‘삼성차의 품질에 걸맞는 자존심’을 되찾자는 것이 직원들의 한결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옥인수 차장의 말은 좀더 실감 나게 들린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차 만드는 일뿐이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은 다음이기에, 일하는 기쁨이 더 크다. 이제 시동이 걸렸고, 기름과 배터리(의욕)도 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출범 당시 삼성차 부산공장의 인원은 3천 명 선이었다. 빅딜 추진 과정에서 명예퇴직을 택하거나 계열사로 자리를 옮긴 인원이 1천4백여 명, 벤처 기업 창업 등 새로운 길을 찾아 그만둔 인원을 합치면 지난 6월 말까지 꼭 절반이 삼성차를 떠났다. 차체 조립 라인의 김 아무개씨(37)는 “동료들의 자리가 하나둘씩 비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함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씩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를 투자한다’는 오기로 버텼다”라고 했다.


‘삼성차 팬클럽’ 만든 택시기사들

마지막까지 남은 직원들은, 그래서 자신들을 ‘삼성차의 수호 천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같은 표현에는 고급 인력 수천 명을 불러모았다가 곧바로 바닷가에 ‘유기(遺棄)’한 주인을 대신해 공장을 지켰다는 당당함과, 삼성그룹에 대한 섭섭한 심경이 복합되어 있다.

이들이 새 주인 르노에 거는 기대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의 고손자인 슈웨제르 회장(58)이 부산을 방문한 뒤로 더욱 커졌다. 지난 6월13일 공장을 찾은 슈웨제르 회장은 삼성차 인력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부산 공장 직원들은 역량이 뛰어나고 한국차 시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동안 고생도 했으니 일반 직원은 물론 임원들도 계속 회사에 남아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올해 안에 출범 초기 수준인 연간 생산 규모 5천대 수준을 회복하고 2003년 15만대, 2004년 50만 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특히 2004년 이후 생산 규모는 신 모델 출시를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이에 필요한 3억 달러를 4년에 걸쳐 투자하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일거리에 목말랐던 차에, 용기 백배할 만한 발표였다.

부산 시민들의 후원도 든든한 힘이다. ‘부산경제 가꾸기 시민연대’(공동의장 박인호 외)는 지난 14일 일본 최대의 자동차 부품산업 집적지역인 규슈와 정보 기술 경영 행정 등 각 부문을 연계하는 ‘부산-규슈 차(車) 산업 벨트’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말 이미 자동차 부품 분야를 핵심 전략 사업으로 선정해 5년간 2천4백억원을 투입하기로 한 부산시도, 오는 8월4일 부산시청에서 두 지역 전문가와 행정 관계자가 참여하는 워크숍을 마련하는 등 시민연대의 계획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부산에는 아예 ‘삼성차 팬클럽’을 결성한 택시 운전자들이 있다. SM5를 모는 개인 택시 기사 2백여 명이 모여 결성한 ‘SM 콜’이 그것이다. 이들은 승객이 연락(연락전화 631-7000)해 오면 24시간 가동하는 무선 통신망을 통해 최단 거리에 있는 회원을 호출 지점으로 출동시킨다. 별도 요금도 없는 서비스다.

운전 경력이 10∼30년인 이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승객들도 자연스럽게 삼성차의 ‘팬’이 된다. 운전 경력 19년째인 임수택씨(39·사진)의 삼성차 예찬은 유별나다. 부산지역 한 대기업 회장의 운전기사로 10년 가까이 일했다는 그는 “현재까지 접해 본 어떤 고급차도 SM5보다 못했다”라고 단언한다.

삼성차는 지난 달 공고를 내 현재 천 명 규모의 인원을 선발하고 있다. ‘르노-삼성’ 출범 즉시 대대적인 판매전에 돌입하기 위한 영업 분야가 주축이다. 그러나 르노가 삼성차의 핸들을 물려받아 제 속도를 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14일 설립 절차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진 르노-삼성 신규 법인이 삼성차 채권단과 자산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실사와 평가 등을 거쳐 인수 절차를 마무리하자면 빨라야 9월 초에나 본격 가동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엔진 회전수를 잔뜩 높인 채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주기만 기다리는 삼성차 근로자들에게, 올해 8월은 무척이나 덥고 길지만 견딜 만한 여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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