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해체의 길로 들어서다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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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단 주도, 구조 조정 추진… 그룹 해체·김우중 회장 퇴진 ‘기정 사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실업을 설립한 것은 67년,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사업 초기부터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고, 1년의 절반을 해외 현장에서 보낼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 시간이 아까워 아직까지 골프를 치지 않고, 기내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무협 영화를 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 중독증 환자. 맨주먹으로 시작해 한국 5대 재벌 총수가 되었기에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는 칭호가 따라붙었다.

그런 그에게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충격은 가혹했다. 경영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그는 확장 전략을 계속 펼쳤다. 그것이 결국 대우그룹을 사실상의 부도 사태에 빠뜨렸다. 그는 하루아침에 ‘실패한 경영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으로 그가 대우그룹 총수 직함을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2년. 그 뒤에는 불명예 퇴진할 수밖에 없다.

7월19일 대우그룹이 발표한 구조 조정 방안은 절박한 상황에서 내놓은 비장의 카드였다. 김우중 회장은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전재산을 담보로 내놓았다. 여기에 그룹 계열사 자산까지 합치면 10조원 규모. 어떻게든 대우그룹 부도를 막아야겠다고 판단한 정부는, 채권 금융기관들에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해 주도록 압력을 가했다. 지난해 말부터 회수한 4조원을 다시 대출해 주도록 했고, 10조원 규모의 단기 대출금 만기를 연장해 주도록 했다. 대우그룹에 6개월 여유를 주고 구조 조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것은 금융 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주가가 연이어 폭락하고, 환율과 금리가 들먹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위안화 평가 절하설까지 터져 나왔다. 이러다 자칫 제2의 금융 위기가 터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상황이 악화하자 정부가 발벗고 나섰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강봉균 재정경제부장관은 대우가 내놓은 10조원 규모의 담보를 처분할 권한이 채권단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채권단이 주도해 대우그룹 구조 조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주)대우와 대우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는 모두 매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채권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대출금을 출자 전환하도록 했고, 필요한 경우 감자를 단행하도록 했다. 6∼64대 그룹 계열사에 적용했던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제도가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목적은 ‘대우 사태’로 인한 경제적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김우중 특유의 뚝심, 더 이상 안 통해

대우그룹 관계자들은 이같은 조처에 당황하고 있다. 대우그룹의 한 관계자는 “당초 정부가 제시한 방안은 지금과 달랐다.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우선 제기한 것이 담보물 처분권. 7월19일 대우그룹이 발표한 방안에 따르면, 10조원 규모의 담보물은 대우가 6개월 안에 구조 개혁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할 경우 처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채권단이 판단해 언제라도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밝혔다.

대우그룹이 이것에 민감해 하는 이유는 김우중 회장의 사재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회장은 집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을 모두 내놓았는데, 이것이 처분되고 나면 김회장은 가지고 있는 재산 전부를 내놓은 꼴이 된다.

다음은 대우증권 매각 문제이다. 대우증권은 그룹 내에서 보이지 않게 자금줄 노릇을 톡톡이 해 왔다. 신용 등급이 낮은 대우그룹 계열사들이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발행할 때 이를 소화해 준 것이 대우증권이다. 따라서 우량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속빈 강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어쨌든 대우그룹이 그룹 체제를 유지하려면 대우증권이 반드시 필요한데, 정부가 이것도 매각 대상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정부 계획대로 구조 조정 작업이 추진되면, 대우그룹 해체는 불을 보듯 뻔하고, 김우중 회장도 불명예 퇴진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전문가들은 대우의 자금난을 만성병에 비유한다. 실제로 발병해 심각한 지경에 빠진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때마다 김회장이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돌파했다. 대우 옥포조선소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몇 년씩 기거하며 위기를 돌파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자금 악화설이 흘러나와도 ‘어떻게든 넘기지 않겠느냐’고 대우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IMF 사태가 닥친 후, 김우중 식의 위기 돌파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조원동 재정경제부 정책조정심의관은 “청와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정부가 5대 재벌에 구조 조정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회사채 발행 제한되자 자금 사정 급속 악화

흥미로운 것은 김우중 회장의 반응이다. 당시 공석이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차기 회장에 지명되어 있던 김회장은,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정부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여갔다. 전경련 회장에 추대된 직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외환 위기가 끝났다고 본다”라고 말하고, 리딩 뱅크(선도 은행) 설립안을 들고 나왔다. 5대 재벌 가운데 4대 그룹이 5억 달러씩 출연해 20억 달러 규모의 선도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안은 정부가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재벌이 구조 개혁을 미루고 은행을 사금고화하려는 기도로 받아들였다.

김회장은 또 정부에 대고 무역 금융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정부의 구조 조정 정책이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이라며 한국 경제를 살리려면 수출을 늘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계가 나서서 5백억 달러 경상 수지 흑자를 달성할 터이니, 외환 보유고 가운데 50억 달러 정도를 무역 금융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는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한 것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대우그룹에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지난해 대우는 자동차 내수 시장이 침체하자 밀어내기 식으로 수출을 늘렸다. 그것은 이 시기 그룹의 매출 채권이 급증한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지난해 그룹의 매출액은 24.6%밖에 늘지 않았지만, 매출 채권은 280% 늘었다. 매출 채권이 많다는 것은 해외에 외상으로 깔아 놓은 돈이 많다는 것.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금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재벌에 대한 수출 자금 지원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5대 재벌에 대한 지원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등이 반대하는 사항이고, 수출을 늘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구조 개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재벌이 수출을 우회적인 자금 조달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김회장은 ‘비상 시국에 정부가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다’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지난해 말 5대 재벌의 회사채 발행을 제한했다. IMF 사태가 닥친 뒤 5대 재벌이 자금 시장을 독식하자, 이를 막기 위해 재벌의 회사채 발행을 제한한 것이다. 이것은 대우에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현대·삼성 등은 주식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대우는 계열사 주가가 대부분 액면가를 밑돌아 증자가 불가능했다. 신용도가 낮아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자금 조달 창구라고 할 회사채 발행마저 제한을 받게 되니 사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노무라 증권 보고서 파문이 터진 것이 이 때였다. 노무라 증권 서울사무소 고원종 부장은 ‘대우에 비상 벨이 울리고 있다’는 3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대우가 유동성 위기에 몰리고 있고 워크아웃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에 대우그룹 계열사를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주)대우 장병주 사장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이규성 전 재경부장관도 기자 회견을 통해 거들고 나섰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다투어 채권 회수에 나섰고, 국내 금융기관들도 이에 가세했다.

재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현재 대우그룹의 해외 현지 차입금은 92억 달러였다. 그런데 이것이 최근에는 73억 달러로 줄었다. 20억 달러 정도를 회수당한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들도 만기가 도래하면 가차없이 채권을 회수했다. 이 때문에 대우는 콜금리로 자금을 빌려서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대우그룹의 부채 구조가 초단기화했고, 콜금리로 돈을 빌려 만기 부채를 갚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사정이 다급해지자 정부가 나섰다. 한편으로는 자산 매각·외자 유치 등을 통해 기업의 부채 구조를 개선하라며 대우를 닦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우전자-삼성자동차 빅딜을 통해 대우의 자금난을 덜어주려고 했다. 흑자 기업인 대우전자를 삼성전자에 넘기고, 적자 기업인 삼성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서 넘김으로써, 그 차액이 삼성에서 대우로 흘러가도록 했다. 대우그룹의 구조 조정을 촉진하면서 유동성 위기도 해소시켜 주는 일거양득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우그룹이 구조 조정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채권 금융기관과 체결한 대우의 채무 구조 조정 약정에 따르면, 대우의 분기별 자구 계획은 올해 4/4분기에 집중되도록 되어 있다. 1/4분기 목표(6조5천억원)가 미미한 데다, 이행 실적도 19%에 불과할 정도로 미진했다.

자산 매각·외자 유치가 회생 관건

5대 그룹 가운데 대우의 구조 조정 실적이 가장 저조하자, 정부는 분기별 점검 시기를 늦추어 가며 대우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대우는 4월19일 추가적인 구조 조정 방안을 발표하고, 5월17일 수정된 재무 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했다. 이것만 제대로 지켜져도 대우의 재무 구조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금융 시장이 더 이상 대우를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온갖 악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대우가 인천항 항만 이용료를 6개월 동안 연체하고 있다’‘자동차공업협회 회비도 못내고 있다’‘공정거래위원회 조사를 받는 대우가 제대로 자료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대우-삼성 자동차 빅딜 협상이 결렬된 후 대우의 경영 환경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 국내 신용평가기관들도 대우그룹 계열사 신용 등급을 일제히 투기 등급으로 떨어뜨렸다. 자금 조달 금리가 올라갔고, 그렇게 해서도 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번에 정부가 개입함으로써 대우는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핵심 과제는 대우가 과연 건전한 수익 구조를 갖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불필요한 자산을 대거 매각하고 외자를 유치해 부채 규모를 줄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금융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자산을 매각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우는 지금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 매각하려는 자산은 당연히 제값을 받을 수가 없다. 게다가 대우가 예상하는 전체 매각 대금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대우중공업 조선 사업 부문 매각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조선 경기는 몇년 간의 호황을 끝내고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소를 매각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현재 전문가들은 대우 사태가 ‘제2의 기아 사태’로 발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중국 위안화 평가 절하설이 그같은 우려감을 증폭시킨다. 2년 전 기아 사태에서 한국 경제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새삼 떠오르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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