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3세 경영인’ 체제 개막?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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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처리 따라 지배 구조 변화… 장남 이재용씨, 삼성생명 최대 주주로
지난 7월7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20층 중식당 호경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 경제 신문 기자와 삼성생명 관계자 등 12명이 둘러앉았다. 오찬을 겸한 이 날 기자 간담회는 언론을 기피하기로 유명한 이수빈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장(60·삼성생명 회장)이 자청해 마련한 자리였다.

세상이 온통 삼성자동차·삼성생명 얘기로 들끓는 지금, 그가 과연 얼마나 영양가 있는 얘기를 내놓을까? 조바심을 내며 앉아 있던 기자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수많은 방안을 검토했지만, 삼성생명 주식 출연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 이외에는 추가 출연할 수 없다….” 기자들은 그의 발언을 취재 수첩에 옮겨 적느라 음식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삼성생명 상장 치밀하게 준비

이수빈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이 늘어난 경위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1년 만에 이회장 지분이 10%에서 26%로 늘어난 것은 퇴직 임원들이 갖고 있던 주식을 매입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지난해 국세청 기준대로 산정한 삼성생명 주가가 6천8백원이었는데, 퇴직 임원들에게는 그보다 약간 높은 9천원을 주고 사들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을 그대로 믿는 기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 명의로 위장 분산했던 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자신이 갖고 있던 지분을 이건희 회장과 에버랜드에 넘긴 삼성그룹 퇴직 임원은 모두 13명. 삼성카드 부회장을 지낸 소병해씨(57)와 삼성생명 고문을 지낸 윤재우씨(59) 등이 대표적이다.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소씨는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고사했고, 윤씨는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 간의 거래이다.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하겠다며 덤비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천하의 삼성’이 법을 어길 정도로 허술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상장 특혜설·위장 분산설 등을 쏟아냈던 삼성생명 문제는 증시 상장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지난 9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기자 간담회에서 삼성·교보 생명을 상장시키겠다고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견을 보이는 부분은, 상장에 따른 이득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 하는 점이다. 금감위는 특혜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8월부터 생보사 상장 기준과 이익 배분 방법에 대한 여론 수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소요되는 기간을 감안하면 생보사 상장은 내년 2~3월께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를 대비해 진작부터 예비 작업을 벌였다. 은밀히 자산을 재평가했고, 삼성증권·삼일회계법인에 맡겨 적정 주가를 산정하는 작업도 마쳤다. 지난 5월4일 삼성생명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 이수빈 회장이 우리사주조합 결성 방침을 밝힌 것도 그 때문이다. 그룹의 공식 입장은 사원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을 공개하기 위한 예비 조처였다. 삼성측은 64억원 규모로 신주(액면가 5천원)를 발행해 우리사주조합에 배정해 자본금을 천억원 규모로 늘릴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삼성생명 직원들은 대부분 억대 부자가 된다.삼성생명 이사회는 수권자본금 한도 역시 늘려 놓았다. 9백60억원으로 되어 있던 수권자본금 한도를 상장에 대비해 3천억원으로 대폭 늘린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이건희 회장의 지분 증대와 관련이 있으리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삼성생명 상장 문제가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어떻게 대주주 지분을 늘리기 위해 편법을 자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제도를 보더라도 상장 전 1년 안에는 대주주의 지분을 변동시킬 수 없다. 상장을 앞두고 대주주가 지분을 위장 분산해 세금을 포탈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설사 삼성생명이 상장 전에 증자를 하더라도 턱없이 낮은 주가로는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삼성생명의 적정 주가가 70만원이 넘을 것이라고 얘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회장의 지분을 늘리기 위한 증자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생보사 상장 방침이 정해진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쏠리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4백만 주를 내놓은 뒤 그룹의 지배 구도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는 점이다.

삼성그룹 계열사 가운데 현재 상장 회사는 14개이다. 이 가운데 이건희 회장이 주식을 갖고 있는 기업은 네 군데. 그룹의 주력 업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지분율 2.11%)·삼성물산(1.62%)·삼성증권(0.41%)·삼성화재(0.32%)가 전부이다. 지난 7월10일 종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시가 총액은 5천6백98억원 정도이고, 보유 주식은 5백53만6천여 주이다. 주식 수로 따지면, 상장 계열사 전체 주식의 0.6%로 미미한 수준이다.

부실 삼성차가 준 선물 ‘경영권 대물림’

그런데도 그가 삼성그룹 총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삼성생명 덕분이다. 삼성생명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증권·삼성화재·호텔신라의 최대 주주이다(도표 참조).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은 다시 삼성전기·삼성전관·제일기획 등의 최대 주주이고, 그 밑에는 또 다른 중견 계열사가 포진해 있다. 그룹 계열사 전체가 하나의 복잡한 그물망을 구성하고, 이것이 피라미드 모양을 만든다. 그 정점에 삼성생명이 버티고 있어서, 삼성생명만 장악하면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내놓으면서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 상층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가 이건희에서 삼성에버랜드로 바뀐 것이다.

경위를 보면 이렇다. 지난 3월 말 현재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은 4백86만7천2백주로, 전체 주식의 26%이다. 그런데 이회장이 4백만주를 내놓기로 함으로써 지분율이 4.63%로 줄고, 대신 20.67%를 갖고 있는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가 이회장의 장남인 재용씨(31.4%)이고, 나머지 세 딸이 10.5%씩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는 점이다. 이들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62.9%, 여기에 이회장 지분까지 합치면 67.6%나 된다. 삼성자동차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후에 있던 에버랜드와 이회장의 자녀들이 급부상한 것이다.

물론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이건희 회장에게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보면 삼성가의 경영권은 3세 체제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것이 삼성자동차를 부실하게 경영한 책임을 진 데서 나온 ‘선물’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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