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TV? 한국에 물어봐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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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LG, 해외 디지털 텔레비전 시장 선점…상표 지명도 높이기·내수 기반 확보 등이 숙제
꿈의 시장. 한국 가전업계가 고선명 텔레비전(HDTV), 그 중에서도 디지털 방식의 고선명 텔레비전 시장을 가리켜 일컫는 말이다. 2005년 국내 시장 규모만 3조원. 미국 시장 규모는 3천억 달러(대략 3백60조원). 디지털 텔레비전은 대당 가격이 6천∼만 달러인 고부가 가치 품목이다. 이 ‘꿈의 시장’에 발을 먼저 내디딘 업체는 국내 가전 회사들이다.

삼성전자·LG전자·대우전자는 차세대 텔레비전 방송 양식이 디지털화하리라고 보고 10년 전부터 이 기술을 연구·개발해 왔다. 기존 컬러 텔레비전 기술을 주도해 온 일본과 미국이 아날로그 방식의 고선명 텔레비전 개발에 매달리는 동안 일찌감치 디지털에 초점을 맞춰 개발을 서둘렀던 것이다.

삼성 55인치, LG 28인치 수출 개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가전 업계는 디지털 방송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방송 수신용 핵심 칩셋 △초대형 프로젝션 방식 텔레비전 세트 △디지털 셋톱박스(set top box: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 부착해 특정 기능을 추가하는 기구)를 개발하고 무궁화 위성을 이용해 시험 방송까지 끝낸 상황이다.

이들이 겨냥하는 주 타겟은 외국 시장.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디지털 방송이 시작되지 않아 수출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LG전자는 영국, 삼성전자는 미국 시장에 각각 28인치와 55인치 디지털 텔레비전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22개 도시 47개 방송국에서 디지털 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미국 시장의 잠재력은 엄청나게 크다. 지난해 미국 소비자전자제품제조협회(CEMA)는 미국 디지털 텔레비전 시장이 2002년 2백만대, 2005년 7백만대 규모로 커지리라고 예측했다.

국내 업체들이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전략은 시장 선점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시장에 디지털 텔레비전 5백대를 수출해 미국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올해는 만대 이상을 자체 상표로 수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하반기에 수원과 멕시코 티후아나 공장에 생산 라인을 증설했다. 또 지난해 말 미국 방송장비 제조업체인 해리스와 손잡고 방송국용 디지털 셋톱박스를 방송국 34곳에 공급했다.

LG전자도 미국 자회사인 제니스를 활용해 다른 나라 업체보다 미국 시장 공략을 서두르고 있다. 제니스와 함께 개발한 디지털 방송 수신용 고선명 셋톱박스에 제니스 상표를 달아 지난 1월 초부터 5천9백99 달러에 미국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이 셋톱박스는 방송 스크린룸·스포츠 바·극장을 비롯해 상업용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미국 규격을 충족시켜 이미 판매하고 있는 제니스의 고화질 프로젝터와 연결하면 100∼200 인치 대형 화면에 고화질 영상과 컴팩트디스크(CD)와 같은 음질로 디지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시장에 55인치 디지털 텔레비전을 수출하기 시작한 삼성전자는, 올해 5월부터는 65인치 제품도 수출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LG전자는 64인치 제품 개발을 끝내고, 올해 5월 미국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다. 이 제품들은 33인치 텔레비전 4개를 합친 크기의 초대형 화면에다 영상과 음질이 뛰어나 제품 발표회나 전시회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LG전자는 미국보다 유럽 시장에 먼저 진출했다. 이미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영국 시장에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28인치 디지털 위성 방송 텔레비전 8천여 대를 공급했다. 올해 상반기 안에 2만여 대를 공급할 예정이다. LG전자는 영국에 공급하는 제품에 대해 영국표준협회(BSI)로부터 세계 최초로 안전 규격 인증을 얻었다. LG전자는 지난해 7월 말 전세계 디지털 셋톱박스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영국 페이스마이크로테크놀로지(PMT)와 제휴해 유럽 특성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유럽 지역을 공략할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LG전자가 PMT와 함께 개발하는 제품은 iDTV(integrated Digital TV·통합 디지털 텔레비전)이다. 이 제품은 셋톱박스가 따로 없어도 디지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제품이다. 대우전자는 가정용 디지털 TV에 주력

대우전자는 삼성·LG와는 다른 전략을 갖고 있다. 두 업체가 화면이 큰 제품을 갖고 수출 시장을 열려고 하는 데 비해 대우전자는 처음부터 가정용 제품에 역점을 두었다. 대우전자는 화면 크기가 46·48인치인 제품을 개발했다. 또 브라운관 방식을 적용한 고선명 디지털 텔레비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용화는 삼성전자나 LG전자보다 다소 뒤진 형편이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선진 업체들은 2000년 3월 이후에나 영국 시장에 들어서리라 전망된다. 따라서 LG전자가 한 발짝 앞서 영국에 들어간 셈이다. 삼성전자도 국내외 경쟁 업체보다 6개월 가량 빨리 미국 시장에 들어갔다.

국내 업체들이 시장 선점에는 성공했다고 자평하지만 그 효과를 살리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상표의 성가를 높이는 일이다. 국내 업체가 만들어낸 텔레비전 제품은 지금까지 아날로그 텔레비전 시장에서는 일본 상표에 밀려 2류 제품으로 통했다. 기술력은 일본과 엇비슷하고 상용화에는 한 발짝 앞섰지만 지금까지 외국인에게 박혀 있는 2류 상표라는 이미지가 자칫하면 국산 디지털 텔레비전의 지명도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고급 제품에는 탄투스(TANTUS)라는 새 상표를 붙여 수출한다. LG전자는 미국 시장에서 LG 상표 대신 제니스 상표를 붙여서 공급하고 있다.

한국 업체가 상표 지명도 때문에 가지는 고민은 하나 더 있다. 지금은 한국 업체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소니·미쓰비시·톰슨같이 상표의 지명도가 높은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제품을 내놓기 시작하면 밀리지 않겠느냐는 우려이다. 일본은 초기에 아날로그 고선명 텔레비전 기술에 치중하느라 디지털 기술 상용화에 다소 뒤졌지만 디지털 텔레비전이 본격 보급되면 언제든지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기술과 판매망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한다.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 기술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갈 수 있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수출 산업은 탄탄한 내수 시장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디지털 텔레비전을 수출 주력 상품으로 성장시키려면 하루빨리 내수 시장을 키워야 한다. 미국이 이미 디지털 방송을 시작했고, 일본이 2001년 디지털 방송을 시작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1월27일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 3사 등이 마련한 초청 강연에서 “우리나라도 미국·일본과 함께 2001년 디지털 방송을 시작해야 한다. 가전업체들이 내수 시장에서 디지털 텔레비전을 생산·판매해 내수 기반을 다진 후 수출 시장을 공략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보통신부는 2001년부터 국내에서 디지털 방송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01년 국내 텔레비전 시장에서 디지털 텔레비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그칠 듯하다. 고작 10만대, 금액으로는 5천억원 수준이다. 하지만 해마다 100%가 넘게 성장해 3∼4년 뒤에는 백만 대를 넘어설 것이며, 아날로그 방송이 끝나는 2006년에는 해마다 1백30만대씩 신규 수요가 창출되어 3조원이 넘는 시장이 형성되리라고 국내 가전업계는 전망한다. 이는 지난해 국내 아날로그 텔레비전 시장(9천억원 규모)의 3배가 넘는 규모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6천∼만 달러(72만∼1백20만 원)인 가격을 현재 텔레비전 가격 수준으로 낮추어야 하는데, 2001년이 되면 가능하리라는 전망이다.

디지털 텔레비전 생산 기술은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 기술과 함께 국내 업체들이 상용화를 선도하는 몇 안되는 분야이다.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은 미국·유럽 표준과 맞지 않아 시장을 뚫는 데 한계가 있지만 디지털 텔레비전은 이제 규격과 표준이 마련되고 있어 지금부터 그에 맞게 생산하면 이 시장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상표의 성가를 높이고 내수 시장 기반을 충분히 다져야 한다. 그 장애물만 뛰어 넘는다면, 디지털 텔레비전은 한국 업체들에게 제2의 반도체, 꿈의 시장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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