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복병/''재벌 빚''첩첩산중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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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복병은 무엇인가/“부채 비율 200% 달성 못하면 외환·금융 위기 재발”
지난 3월11일 문정인 교수(연세대·정치학)는 외국인 투자가들로부터 집중적인 질문을 받아야 했다. 한국 경제에 관심 있는 국제 투자가들이 취재할 목적으로 정치인·경제 관료·기업가 들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의 남북 관계에서부터 노동계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한 대목에서만큼은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재벌 기업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나 자신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문교수의 말이다.

같은 날 국제적인 신용 평가 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한국 경제에 대한 신용 등급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1월25일 신용 등급을 투자 적격으로 상향 조정한 뒤 발표된 한국 경제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분석 자료였다.

9쪽인 이 자료에는 요즘 흔히 듣게 되는 낙관적인 얘기와는 전혀 다른 분석이 실려 있었다. ‘상당수 주요 재벌들의 불확실한 존립 가능성: 한국의 64대 재벌 가운데 상당수가 낮은 수익성과 높은 부채 비율을 갖고 있으며, 호의적인 외부 여건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 중간 규모인 몇몇 재벌은 은행에 부채 탕감이나 만기 연장을 요구할 것이나, 일부는 정리될 것이다.’ 이 평가 기관은 신용 등급을 더 올리지 못하는 이유로 이런 재벌 기업의 문제와, 금융 부문 구조 조정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이 보고서가 나오기 하루 전인 10일에는 보스워스 주한 미국대사가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했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 최고 경영자 월례 조찬 간담회에 참석해, “경기가 회복되는 듯하자, 채권 금융기관의 추가 구조 조정 요구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재벌들이 있어서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이 빚이 많다는 사실이 뭐가 새삼스러울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은, 그동안 정부가 재벌들에게 구조 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내놓은 단순한 엄포와는 다르다. 뭔가 우려할 만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우선 지난 한 해 한국 기업들의 상황이 더욱 악화했을 수 있다. 3월 결산 법인이 많은 한국 기업들의 지난 한 해(회계 연도) 경영 실적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빚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지난해 회사채 발행을 포함해 기업들이 새롭게 차입한 금액이 64조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업의 수익성도 지난해에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산 재평가나 유상 증자 등을 통해 기업의 부채 비율이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부채 총량은 크게 늘어났으리라는 점이다(부채를 자기 자본으로 나누는 속성으로 인해, 자산 재평가나 유상 증자 등으로 자기 자본이 늘어나면 부채 비율은 떨어진다).부채 비율 200% 달성에 55조~1백65조 소요

시기 또한 미묘하다. 정부와 재벌은 올해 연말까지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겠다고 대외적으로 공언했다. 외국인 투자가들 역시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최근 펴낸 <부채 비율 200% 달성을 위한 정책 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정부 정책과 기업의 대내외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시한 내에 목표를 달성해야 하며, 그 실천 방안도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11일자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의 신용 등급 보고서는, 재벌들이 실질적인 부채 축소보다는 자산 재평가를 통해 부채 비율 목표를 달성하려는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금융감독위원회의 입장 역시 자산 재평가로 인한 부채 비율 감소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대로라면 재벌들은 연말까지 부채 비율 목표를 못 채울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정부에 부채 비율 축소를 위한 각종 대책을 건의하려고 만든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보고서는 현재 한국 기업과 정부 능력으로는 추가로 자금을 조달해 부채 비율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상장 기업들의 부채 비율을 200%로 끌어내리는 데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자금은 최소 55조∼1백65조 원. 증권업계는 올해 상장 기업들의 유상 증자 물량이 10조원이 훨씬 넘을 것으로 전망하지만, 그동안 한국 기업들의 연평균 유상 증자 규모는 6조원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유상 증자 규모는 증시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지난해 한국 정부의 예산 규모가 86조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원 조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부와 기업들이 대내외에 공표한 부채 비율 200%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월 스트리트에서 활동하는 한 한국인 투자가는 “강도는 떨어지지만, 외환 위기 직후의 악몽이 재현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용 등급이 떨어져서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국제 금융 시장에서 돈을 구하기 어렵게 되면, 가까스로 진정시킨 외환·금융 위기가 재발한다는 것이다. 이 투자가는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 편입된 것을 주진(主震)에 빗대어 이런 상황을 여진(餘震)이라고 부른다.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현실화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수출 대폭 감소로 인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68∼69쪽 딸린 기사 참조).

물론 그 전에 정부가 부채 비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단의 조처를 취할 수도 있다. SBC와버그딜론 증권 서울지점 윤용철 부장은 “기업의 부채를 지분으로 교환해 주거나, 만기를 연장해 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은 외환 위기 직후부터 줄곧 이런 방법들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해 왔다.

예를 들어 지난해 10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주최한 ‘한국 경제의 구조 조정:평가 및 전망’이라는 국제 세미나에서 이라 리버만 세계은행(IBRD) 민간부문 개발국장은 주식-부채 교환과 부채 탕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같은 정책들이 이제 구조 조정을 어느 정도 마무리지은 금융기관들에 다시 큰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재벌 기업들의 빚을 주식으로 전환해 주는 것이나, 만기 연장을 해주는 것 모두 금융기관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럴 경우 정부가 이들 금융기관에 지원을 해줄 수밖에 없게 된다.금융기관 구조 조정비 크게 늘면 문제 심각

따라서 이는 금융기관 구조 조정의 재원 규모에 대한 논란과 직결된다. 현재 정부가 금융기관의 구조 조정을 위해 쓰려는 자금은 64조원. 국내 금융 부문의 부실 채권 규모가 그쯤 되리라는 추정에 근거한 수치다.

그러나 10일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금융 구조 조정 비용이 평균 1백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재원의 거의 두 배 규모이다. 이 신용평가기관은 아직도 불확실한 한국 금융기관들의 부실 여신 규모와 채권 회수율을 감안해 만든 여섯 가지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금융 구조 조정 비용이 1백1조∼1백7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 역시 소요 재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난 2월 말 재정경제부가 만들어 내놓은 <국민의 정부 1년-경제 정책의 성과와 과제>라는 자료집을 보면,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소요 재원이 늘어날 경우 성업공사가 매입한 부실 채권 매각, 자산담보부증권(ABS) 발행, 예금보험공사가 취득한 주식 매각 등을 통해 최대한 조달할 계획’이라고 되어 있다. 가능하면 추가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 없이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만일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으로 알았던 금융 부문의 구조 조정을 위해 다시 세금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번질지도 모른다. 구조 조정 과정에 불만을 품고 있는 노동계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한낱 괴담으로만 그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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