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자동차 ‘빅딜’에 우는 부산 사람들
  • 부산·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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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 르포/삼성자동차 빅딜로 벼랑 몰린 사람들
12월7일. 이 날은 삼성그룹의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날이 되었다. 4년 전 김영삼 정부로부터 자동차 사업 진출을 공식 승인받은 것도 이 날이고, 최근 청와대 정·재계 간담회에서 자동차 사업을 공식 포기한 것도 이 날이다. 21세기를 겨냥한 이건희 회장의 ‘역작’은 제대로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아마 이건희 회장 자신일 것이다. 자동차 사업은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추진한 숙원 사업인데다, 이회장 역시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 온 일이다. 이것이 실패로 끝났으므로, 그 부담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회장이 사과해야”

하지만 이회장의 잘못된 투자 또는 부실한 경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된 사람은 삼성자동차 직원과 협력 업체 사람들이다. 그룹측은 일단 삼성자동차와 삼성전기 자동차부품(AP) 직원들의 고용은 보장할 방침이다. 생산직 사원은 삼성자동차가 대우로 넘어가더라도 필요한 인력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고, 여기서 탈락하는 인원을 삼성측이 떠맡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성자동차 직원들은 반신 반의한다. 모든 계열사가 직원을 자르지 못해 난리인데, 어떻게 자기들을 받아 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고용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대우전자와의 빅딜은 찬성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지난 12월10일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에서 만난 김 아무개씨(34).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근무하다 삼성중공업에 특채된 그는 곧바로 ‘21세기 기획단’에 배속되었다. 이 조직은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곳으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사무실을 세 번이나 옮겼다. 그는 공장 건설과 기술 도입 등을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일본에 출장을 다녀왔다. 삼성이 그룹의 역량을 모아 투자한 사업인 만큼, 삼성자동차가 실패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대우전자와의 빅딜이 발표된 후, 그는 이건희 회장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되풀이 말했다. “이회장이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만큼,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과 한마디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도 그는 이름이 밝혀져 불이익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날 공장 정문 옆 면회실에서 만난 한 직원 부인은 직원들에게 강제로 떠맡긴 SM5를 사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직급에 따라 적게는 1대에서 5대까지 팔도록 할당이 떨어졌는데, 자기 남편은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승진에서 누락해 속이 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성자동차는 12월9일부터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아침 8시에 정상 출근한다. ‘근무 시간’에는 각종 집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다. 하루에 한 번 대규모 집회를 갖고, 대구 상용차 공장, 전국의 영업직 사원들과 연대 투쟁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삼성자동차에서 노조 구실을 하는 것은 한마음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12월11일 신임 투표에서 70% 정도 지지를 얻은 김진섭 위원장은 노조 설립에 반대하는 온건파이다. 그럼에도 그는 반(反) 삼성 투쟁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앞으로의 투쟁 방법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건희 회장 초상화를 앞세우고 날마다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삼성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며 △PC통신과 언론을 통해 삼성의 부도덕성과 비인간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필요한 경우 △SM5를 사원들에게 강매한 자료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하겠다고 덧붙였다.

2천3백여 협력 업체 “우리는 어쩌라고”

삼성자동차 직원들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은 협력 업체 사장들이다. 부산상공회의소에 따르면, 현재 삼성자동차 협력 업체는 모두 2천 3백23개이고, 여기서 일하는 인력은 7만5천명이다. 그 중 1차 협력 업체는 94개이고, 이중 46개 사가 부산·김해·양산 등 부산권에 포진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대·대우·기아 등 여타 완성차 업체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삼성자동차만 바라보고 투자한 기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12월7일부터 대부분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차 협력 업체의 경우 직원은 보통 30∼백여 명이고, 각 업체는 10개 안팎의 2차 협력 업체를 두고 있다. 그 밑에 다시 3차 협력 업체가 있다. 자동차 업계를 거대한 빙산에 비유한다면, 완성차 업체는 물 위에 떠 있는 꼭대기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영세 협력 업체들은 세상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한계 상황에서 신음하고 있다. 당장 한 달만 자금 수혈이 끊겨도 부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취약한 회사들인 것이다.
부산 녹산공단에 있는 대진테크(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회사의 정우균 사장(46)은 현대자동차에서 차장까지 지낸 뒤 투자자들을 모아 창업했다. 삼성자동차에만 70여 개 부품을 납품하는 100% 삼성 협력 회사로, 모기업이 없다는 것이 특징. 정사장은 자본금 10억원으로 녹산공단 7천평 부지에 45억원을 들여 공장을 지었다. 신호공단과 마찬가지로 해안을 매립해 만든 공단이기 때문에, 땅 한 평에 55만원이고, 1∼2m 간격으로 파일을 박을 경우 평당 땅값이 80만원을 넘는다. 이렇게 비싼 땅에 공장을 지은 것은, 삼성자동차 공장이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대진테크가 삼성자동차에 본격적으로 납품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 1월. 납품 단가는 20만대를 기준으로 책정되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3∼4년만 지나면 확실히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를 빗나가고 말았다. 삼성자동차의 올해 목표는 8만대였지만 실제 생산한 대수는 5만대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내년 목표도 15만대에서 9만6천대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협력 업체들이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손익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우선 당장 월말에 돌아오는 어음 결제액을 메워야 한다. 대우가 삼성자동차 인수 작업을 마치는 데는 최소한 3개월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안에 특단의 지원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모든 협력 업체가 도산할 수밖에 없다. 대진테크도 마찬가지이다. 내년 1월부터는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빌린 돈의 원리금을 상환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매달 1억5천만원이 필요하다. 정사장이 현재 갖고 있는 돈은 천만원이 전부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부도를 맞는 수밖에 없다.

최근 부산시가 협력 업체 지원 방안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시의 지원 대책은 실질적인 도움이 안된다. 은행이 추가 담보를 요구하는데, 협력 업체들은 대부분 담보 여력이 없는 상태이다. 공장 부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력 업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대우·삼성이 인수 협상을 벌이는 중에도 협력 업체들을 지원하는 방법밖에 없다.

대진테크가 모기업 없이 세운 회사라면, 한국세큐리트(주)와 신흥기공(주)은 모기업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다. 삼성자동차에 소요되는 모든 유리 제품을 납품하는 한국세큐리트는 군산에 있는 한국유리(주)가 모기업이다. 한편 각종 잠금 장치를 납품하고 있는 신흥기공은 모기업인 신흥정밀(주)보다 투자 규모가 크다.

삼성자동차 빅딜 논의가 가시화한 후 두 회사 모두 모기업으로부터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고 있고, 모기업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차이가 있다면,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모기업에 미치는 파장이다. 한국유리는 걱정이 없지만, 신흥정밀은 덩달아 위험해질 수도 있다. 신흥기공 조래관 사장은 삼성항공에서 20년간 근무한 뒤 삼성자동차 협력 회사 사장이 된 인물. 평생 삼성을 위해 일해 온 그는, 자신이 몸 바친 그룹 때문에 부도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부산 경제 위해서 협력 업체 지원하라”

12월11일 오후 1차 협력 업체 사장들이 동성기공(주)에 모인 것도 그 때문이다. 회의를 주재한 강대승 동성기공 회장은 “이제 협조할 대상은 더 이상 없다. 삼성과의 협조 체제를 투쟁 체제로 전환한다”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동광정기 김광홍 사장)를 발족했다.

부품 업체들은 앞뒤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빅딜을 추진하는 정부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재벌은 은행에서 빌린 돈을 맞바꾸고, 워크아웃을 신청해 부채를 탕감받고, 상환 일정을 재조정하는 특혜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밑에서 자동차산업을 떠받치는 부품 업체들은 소리 없이 모두 죽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회원사가 똘똘 뭉쳐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협력 업체 사장들은 정부와 삼성에 호소문을 보냈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 대기업 빅딜과 상관없이 협력 업체에 운영 자금을 지원하라는 것과, 대우가 인수하더라도 삼성과의 기존 계약 관계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한 협력 업체 사장은 “자동차산업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광주 지역 경제를 위해 아시아자동차를 살렸듯이, 부산 지역 경제를 위해 삼성자동차 협력 업체들을 지원해야 한다”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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