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고통 떠넘기는 일본
  • 김관영 (한양대 교수·경제학) ()
  • 승인 199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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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블록·유로(EURO) 블록에 맞서 엔 블록을 형성하려는 것이 일본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필자는 최근 일본 유수의 민간 연구기관인 미쓰비시 연구소가 주관한 ‘92년 이후 일본 경제의 장기 불황 원인 분석 및 구조 개혁 방향’ 세미나에 참석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막대한 외화 표시 채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본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과잉 설비·효율성 저하·금융 부실 심화·경제적 불안 심리 만연과 같은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태국 같은 주변 국가들이 과감하게 구조 조정을 단행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반면, 일본은 구조 개혁에 지극히 미온적이라는 점이다.

30년 넘게 승승장구하던 일본 경제가 7년째 장기 불황에 빠진 까닭은 무엇일까. 미쓰비시 연구소 전문가들은 네 가지를 꼽는다. △95∼96년에 발생한 일시적 경기 회복을 장기적인 경기 회복으로 오판해, 소비세를 인상하고 재정 긴축을 실시했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부실 자산 처리를 지연해 부실의 골이 더욱 깊어졌고, 이 때문에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지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초저금리와 장기 불황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하고, 이 때문에 투자 심리와 소비 심리가 잔뜩 위축되었다. △일본의 앞마당이라고 할 아시아 경제가 붕괴해 일본이 후폭풍을 맞았다.

이같은 원인들은 두 가지 양상으로 일본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하나는, 제조업 부문의 생산 설비가 적정 규모의 8%를 초과할 정도로 설비 과잉 문제가 심각하고, 다른 하나는 극도로 위축된 소비가 경기 회복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 있고, 0%에 가까운 초저금리로 경기를 부양하려고 애쓰고 있다. 수년째 시행하고 있는 이런 정책이 별로 효과가 없다고 판명 났는데도, 일본 정부와 재계는 계속해서 똑같은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민간 경제 전문가나 정부 관료 들은 일본 경제가 조속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식 또는 태국식의 신속한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를 실행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기업 구조 조정은 대량 실업 사태와 기득권층의 반발이 무서워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고, 금융 구조 조정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은 고통스런 구조 조정을 단행하는 대신, 경기 부양책을 지속해 ‘연착륙’하겠다는 자세를 지키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주변국들에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아시아 각국이 재기하려면 무엇보다 공급 과잉 문제를 함께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변국들이 고통스런 구조 조정을 단행하는 동안에도 일본은 고용 유지를 핑계로 구조 조정을 미루고 있다. 이같은 일본의 정책은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이렇게 해서는 일본 경기가 조기에 회복할 수 없고, 불가피하게 아시아 국가들의 경기 회복 속도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본·아시아 공생의 길은 신속한 구조 조정

일본이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려면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주변국과 마찬가지로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금리를 인상하고, 긴축 재정을 해 부실 기업과 부실 금융기관을 퇴출시켜야 하고, 그런 뒤에 적극적인 부양책을 써서 경기를 되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도 살고 아시아 경제도 회복되는 길이다.

96년 영국의 경제 전문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멕시코 외환 위기 이후에 아시아 국가들에 외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때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 국가들이 단기 외채·경상 수지 적자·외환 보유고 등에서 멕시코보다 낫지만, 멕시코와 달리 어려울 때 도울 부자 이웃(deep-pocketed neighbor)이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경제 블록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일본이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더구나 자기네 부담까지 주변 국가들에 떠넘기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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