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치' 경제 포럼 전성시대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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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학자 등 중심, 다양한 전문가 모임 ‘만발’… 탈정치 토론 문화 주도
전문가들 사이에 포럼 문화가 꽃피고 있다. 90년대 초반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지만, 그 때와 다른 점은 정치에서 경제로, 민주화·통일 같은 거대 담론에서 구체적인 문제 해결 중심으로 화두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경영연구회(대표 김영진 한독약품 회장)이다. 지난 4월8일 저녁 서울 강남 노보텔 호텔 2층에서 열린 경영연구회 월례 토론회. 발제를 맡은 선우석호 교수(홍익대·경영학)는 40여 회원들 앞에서 ‘가치 중심 경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내용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산·매출액 같은 규모 중심의 경영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수익률을 중시하는 가치 중시 경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 날 강조한 개념은 경제적 부가 가치(EVA)였다. 이것은 기업이 영업 활동을 통해 창출해낸 부가 가치의 순증가분으로, ‘세후 영업 이익’에서 ‘총 자본 비용’을 뺀 값이다. 선우교수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부도 난 업체들 대부분이 장기간 경제적 부가 가치가 마이너스였다고 강조하자, 참석자들 사이에는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경영연구회·푸른회, 기업인 주축

한 시간에 걸친 발표가 끝난 후 여기 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경제적 부가 가치를 높일 수 있느냐’‘단기적인 수익률에만 매달리다 보면 반도체·철강 같은 대규모 장치 사업은 하지 말라는 얘기냐’…. 참석자들의 질문은 하나같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경영연구회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데는 김영삼 정부 시절 ‘황태자’로 통했던 김현철씨 역할이 컸다. 97년 1월 한보 사태의 주역인 한보그룹 정보근 회장이 이 모임 회원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경영연구회가 김현철씨의 외곽 단체라는 풍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보근씨와 김현철씨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임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지금도 이들은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현재 회원은 백여명. 80% 정도가 기업가이고, 나머지 20%는 경제·경영 분야의 교수와 연구원들이다. 이들은 매달 한 번씩 토론회를 갖는데, 발표는 보통 내부에 있는 교수가 맡지만, 가끔씩 외부에서 금융 기관장이나 경제 단체장을 초빙하기도 한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해외의 경영 현장을 방문하는데, 지난해에는 대만의 기업체를 방문했고, 올해는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를 방문해 공동 토론회를 가졌다.

경영연구회와 비슷한 조직으로 푸른회라는 모임도 있다. 이원회계법인 김만수 대표가 회장을 맡고 있고, 김석동 쌍용증권 사장, 전인장 삼양식품 사장 등이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회원은 50명 정도이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경영연구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93년 11월에 발족했고, 나이는 30∼40대 초반이 대부분이다.

또 다른 모임인 경제산업연구회는, 2세 경영인들이 주축을 이룬 경영연구회나 푸른회와 달리, 연구원이 주요 구성원이다. 국토개발원 양지청 박사가 92년에 조직했고, 초반에는 교수·연구원·기업가·관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업가와 공무원들의 참여가 저조해 연구자 중심 모임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전체 회원은 50여 명. 이들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경제 현안을 토론하는데, 출판 작업이 활발하다는 점이 남다른 특징이다. 매월 뉴스 레터를 발간하고,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과 <개방 시대의 한국 경제>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경영연구회·푸른회·경제산업연구회가 주로 기업가·학자 들의 모임이라면, ‘미래를 경영하는 연구 모임’(미경연)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회원이 백여 명인데,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기업인·관료·금융기관 임직원·교수·연구원·법조인·언론인 등 다양하다. 회장은 삼성경제연구소 박희정 수석연구원(40)이 맡고 있고, 삼일회계법인 김의형 상무와 참여연대 김주영 변호사가 각각 시니어·주니어 대표를 맡고 있다. 미경연, 다양한 분야 전문가로 구성

이 모임은 회원 선발에서부터 조직 운영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우선 회원 선발 방식. 기존 회원이 추천한 사람을 놓고 10여 명의 회장단이 면접을 보고, 여기서 만장 일치로 통과한 사람에 한해 1년간 준회원 자격을 준다. 그런 다음 활동을 보고 정회원 자격을 부여한다. 정치에 관련된 사람은 절대로 회원이 될 수 없도록 명문화하고 있는데, 이는 모임이 정치에 악용되거나 정치적으로 비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회원이 되기도 어렵지만,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에 통고하지 않고 회의에 두 번 불참하면 즉시 제명된다. 사전 통고 없이 불참하거나 지각하면 과중한 벌금을 물리는데, 걷힌 벌금은 모두 불우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인다.

전자 우편(e-mail)을 통해 활발히 정보를 교류한다는 점도 이 모임의 특징이다. 인터넷 홈페이지(www.shinbiro.com/@mky)를 개설하고 회원들에게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정보를 띄우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연 사이버 공간에는 항상 다양한 의견이 오르고, 때로는 심각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5대 재벌 빅딜과 관련해 정부에 몸 담고 있는 회원과 재계·언론계에 종사하는 회원들이 이견을 보이는 것이나, 대전 법조 비리 사건을 둘러싸고 법조계와 언론계 회원들이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경부에 근무하는 회원들은 ‘IMF 사태 책임을 지고 사퇴할 용의가 없느냐’는 따가운 비판을 듣기도 했고, SK텔레콤의 계열사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는 참여연대의 김주영 변호사와 SK그룹 최재원 전무가 서로 다른 처지에서 싸우기도 했다. 회원 간의 친목 도모가 지상 명제인 여타 모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회원들은 이 모임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이 모임 회원들에게 ‘왕회장’으로 통하는 박희정씨는 “IMF 사태를 처리하느라 가장 바빴던 사람이 바로 우리 회원들이다. 회원 가운데 20% 정도는 항상 해외에 출장 가 있는데, 이들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정을 재조정하거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모임 장소로 달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자랑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 모임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히 지식 공유라고 말한다. 사회는 결국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이끌어 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충분하게 정보를 교류하고 토론을 벌임으로써 세상을 바로 파악하게 된다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정부 정책과 기업 경영, 법원 판결과 언론 보도에도 반영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친목 도모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부산물일 따름이다. 포럼21, 20~30대 중심 신예 그룹

미경연이 주로 30∼40대 전문가들로 구성된 그룹이라면, 포럼21은 20대 중반∼30대 중반 회원들이 주축을 이루는 신예 그룹이다.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는 서울 강남에서 치과병원을 개원하고 있는 양진용 원장(33)이다. 창립한 지 4개월밖에 안되지만, 회원이 1백5명에 이르고, 구성원이 의사·변호사·기자·대학원생 등 다양하다.

이들은 인문사회·생활과학·문화예술 분과로 나뉘어 활동하는데, 총회는 2주마다 서울 강남 지차철역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열린다. 각 분과가 돌아가면서 모임을 준비하는데, 발제자는 대부분 외부 전문가를 초빙한다.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터넷 홈페이지(www.forum21c.com)에 들어와서 토론 내용을 열람할 수 있고, 회원 가입 절차도 그리 까다롭지 않다. 경제적인 이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만, 의료·문화 등 다른 분야에도 다양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진보와 보수로 편가르기를 하는 일도 없다.

양진용씨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화나 통일과 같은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갔다. 지금은 과거의 패러다임이 죽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할 생각이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 및 의견 교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최근 한·일 어업협정 문제도 전문가 부족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며, 똑같은 일이 다양한 분야에서 재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각 분야 전문가들 간의 정보 교환이 필수라는 것이다. 젊은 피 수혈론 나오자 몸 사려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뭉쳐 하나의 포럼을 구성하지 않고, 특정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뭉친 모임으로는 ‘톱 비즈니스 스쿨 클럽’(TBSC)이 있다. 미국의 7개 경영대학원(시카고·컬럼비아·하버드·켈로그·MIT슬론·스탠퍼드·와튼)에서 공부하는 24명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우선 IMF 사태가 닥친 후 미국 경영대학원 출신들이 ‘특수’를 누리는 상황에서, 미국 유수의 경영대학원 재학생들이 모임을 결성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www.tbsc.org)와 관련된 것이다.

미국의 각 대학에 흩어져 있어서 직접 만날 수 없는 회원들은 인터넷을 통해 만나고 정보를 교류한다. 아울러 이들은 국내에 있는 미국 경영대학원 지망생들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자문에 응하고 있다. ‘최고’라는 뜻의 모임 명칭에다, 7개 경영대학원 재학생들로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해 상세한 진학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거나, 앞으로 그런 역할을 떠맡게 될 전문가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확고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분야나 업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전문가들 간에 정보 교환이 필수라고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들은 탈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기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고, 외부 세력에 악용되는 것도 철저히 금하고 있다. 대부분의 포럼들이 정치인을 아예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조직의 힘을 빌려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회원도 제명감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젊은 피 수혈론’이 제기되자, 이들은 오히려 더 몸을 숨기고 있다.

포럼 문화는 앞으로 더 활성화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전공 영역은 갈수록 세분화하고 있는데, 사회 문제는 갈수록 복잡 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 간의 간극을 치유해 주는 것이 바로 포럼 문화이고, 인터넷이 이들 사이에서 전령 역할을 떠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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