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경제]벤처 정신 남기고 간 소니 모리타 명예회장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9.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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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3일 타계한 모리타 아키오 소니 명예회장은 위대한 벤처 정신으로 메이드 인 재팬의 신화를 일구었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이자 세계 경제를 견인하는 기업가였다.”
일본 열도가 도카이무라 원자력 임계 사고로 발칵 뒤집힌 지난 10월4일, 일본 언론이 대서 특필한 것은 원전 사고가 아니었다. 주인공은 그 전날 사망한 소니 명예회장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아사히 신분>은 ‘메이드 인 재팬의 신화가 끝났다’고 했고, <요미우리 신분>은 ‘일본을 초월한 세기의 거인’이라 평했으며, <산케이 신분>은 ‘기술입국의 상징’이라고 그를 극찬했다. 특히 <산케이 신분>은 모리타 아키오 회장의 일생을 평가하면서 그가 만약 6년 전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고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에 취임했더라면 일본 경제의 침체를 막을 수도 있었다고 애석해 했다.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도 추모의 뜻을 표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이며 국제인이었다. 인격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었다. 마치고바(村工場·동네 기업)와 같은 작은 기업에서 출발한 벤처 기업가였으며, 일본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견인하는 기업가였다”라고 모리타의 일생을 평가했다.

이마이 다케시(今井敬) 게이단렌 회장은 “(일본 경제가 침체된) 지금처럼 벤처 정신 발휘가 요구되는 시대는 없다. 이런 시기에 벤처 정신의 상징이던 모리타 씨를 잃은 것은 커다란 손실이다. 모리타 씨가 생전에 주장한 주식 옵션 제도, 지주 회사 해금이 실현된 것을 알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고인을 기렸다.

해외 언론들도 메이드 인 재팬의 상징이던 모리타의 타계를 크게 다루었다. AP통신은 ‘조잡품의 대명사였던 메이드 인 재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혼다 자동차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와 함께 전후 일본의 부흥과 성장을 상징하는 실업가였다’고 소개했다. 영국 BBC방송은 ‘조잡하고 싼 물건이라는 일본 제품의 이미지를 현재와 같이 세계 일류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기업가였다’고 보도했다.

소니의 모리타 명예회장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처럼 일본과 해외 언론이 그의 타계를 대서 특필했는가. 모리타는 우선 오부치 총리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 경제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벤처 기업가였다. 모리타는 78년 전 아이치 현에 있는 유서 깊은 양조장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사카 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옛 일본 해군 기술장교로 복무하다 평생 동업자 이부카 다이(井深大·2년 전 작고)를 만나 46년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을 창립했다.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허름한 건물 3층에 호구지책을 위해 무엇이든 물건을 만들어 볼 작정으로 젊은이 30여 명이 모였다. 제품 개발을 담당한 이부카가 38세, 영업을 담당한 모리타가 25세 때였다. 이부카와 모리타는 자본금 19만 엔으로 회사를 차리고 곧바로 지금의 전기 밥솥과 전기 담요 생산에 착수했다. 그러나 제품이 너무 조잡해 별로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제품 개발에 몰두한 것이 녹음기와 트랜지스터였다.

여기에는 당시 이부카 사장의 벤처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회사가 어려울 때도 낡은 제품을 수리해서 먹고 사는 것보다는 일본에 없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모리타도 작은 나라인 네덜란드 국적의 필립스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자기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 보겠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소니와 워크맨 탄생의 비화

그래서 눈독을 들인 것이 독일제 와이어식 녹음기였다. 이것을 모델로 삼아 녹음기를 만들었고, NHK에 납품해 인정받았다. 50년 첫 일본제 녹음기가 생산된 것이다. 이어 55년에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다. 도쿄통신공업은 이 두 가지 신제품의 성공을 토대로 58년 회사 이름을 ‘소니 주식회사’로 바꾸고 도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모리타의 벤처 정신을 말할 때 워크맨을 개발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모리타는 음악을 좋아해 해외에 출장갈 때마다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녹음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모리타는 즉각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제품 개발을 지시했다.

그러나 부하 직원들은 녹음을 재생하는 기능이 붙어 있지 않고 테이프만 들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는 팔릴 수 없다며 제품 개발에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모리타가 고집해 79년 첫선을 보인 워크맨은 금세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초히트 상품이 되었다.

모리타의 자서전 <메이드 인 재팬>에 따르면, 제품 이름을 워크맨으로 붙이는 데도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워크맨이라는 이름이 엉터리 영어이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제품이 팔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리타는 비영어권에서는 워크맨이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이유로 제품 이름을 워크맨으로 통일시켰다. 소니는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워크맨을 대성공시켜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모리타의 벤처 정신은 그의 취미 생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비록 6년 전 테니스를 치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테니스는 그가 55세 때 배운 것이다. 그는 또 60세 때는 스키에, 65세 때는 요트 조정에 도전하는 왕성한 의욕을 보였다.

모리타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경영인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6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장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그는 이때 미국의 정·재계 지도자들과 친교를 맺는 데도 큰 정성을 들였다. 미국에서 모리타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대접 받아 온 것은 이때 쌓은 인맥이 큰 영향을 끼쳤다.

모리타는 지난해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에 영향력을 발휘한 기업인 20명’ 중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뽑혔다. <타임>은 ‘기업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모리타는 ‘일본 주식회사’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찍혀’ 미국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막대한 대일 무역 적자는 일본 기업들의 집중호우식 수출 때문인데, 그 최전방에 소니의 모리타가 있다는 비난이었다. 66년, 학력이 모든 것 좌우하는 일본에 경종 울려

이러한 비난에 모리타는 89년 으로 응수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현 도쿄도지사와 함께 펴낸 이 책에서 모리타는 ‘10분 정도 앞만 보고 달리는 미국은 쇠퇴한다’고 경고하고, 미국이야말로 불공정한 나라라고 반박했다. 이 책이 나오자 일본 정·재계는 미국의 보복을 크게 염려했으나, 모리타는 할말은 해야 한다며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할말은 한다는 그의 직선적인 태도는 일본 국내에서도 여러 번 화제가 되었다. 모리타는 66년 <학력 무용론>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학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일본의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

70년 일본 기업으로서는 처음 소니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모리타는 재계 활동에도 적극 나서 △연공 서열의 폐해 △연결 경영의 필요성 △주식 옵션 제도 도입 △지주 회사 해금 등을 주장했다. 게이단렌 부회장으로 있던 92년에는 월간지에 ‘일본형 경영이 위험하다’는 주장을 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모리타는 이 기고문에서 ‘일본 기업은 구미에 비해 임금이나 주식 배당을 낮게 책정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수익률이 낮은 것을 감수하며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고 애를 쓴다. 때문에 구미 여러 나라로부터 일본 기업에 대한 비난이 몰리고 있다. 이런 마찰을 해소하려면 일본 기업들은 노동 시간 단축, 급여 인상, 배당 상향 조정, 하청 업체에 대한 정당한 대우 같은 일에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쓰시타·혼다·이부카·모리타…. 전후 일본 경제를 선도해 온 ‘최고’ 경영자들이 연이어 타계했다. 그들이 과거의 인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지금껏 일본 경제를 일으킨 경영자들을 잃고 있는 현실이 일본의 장래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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