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辛삼국’ 시대 열린다
  • 張榮熙 기자 ()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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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삼성, 외국 업체와 짝짓기… ‘물먹은’ 현대, 피말리는 글로벌 경쟁에 내몰려
한국 자동차는 어디로 가는가. 과연 ‘한국차’라는 독자성을 고수할 수 있을까. 한국 자동차 시장은 30여 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격렬한 지각 변동에 휩싸일 전망이다. 대우자동차 매각 작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한국 시장이 초국적 거대 자본의 각축장이 될 공산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다.

한국차를 거친 들판에 내몰고 있는 것은 물론 포드다. 6월26일 대우차 1차 입찰 제안서를 낸 직후 포드의 데이비드 스나이더 실사팀장은 한마디로‘최선을 다했다(We made every efforts)’고 밝혔다. 6월29일 발표된 1차 입찰 결과는 포드가 다임러·현대 컨소시엄과 제너럴모터스(GM)·피아트 컨소시엄보다 월등히 높은 7조7천억원(70억 달러)을 입찰 가격으로 써내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물론 앞으로 6주 정밀 실사한 후 최종 입찰 과정이 남아 있지만, 포드가 단독 우선 협상 업체라는 지위를 남용해 흥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9월 초 포드는 대우차를 무난히 포드 패밀리에 합류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포드, 아시아 공략하려고 대우에 ‘러브콜’

포드는 왜 그렇게 대우차 인수에 적극적일까. 자동차 전문가들은 포드가 대우차를 인수하는 것이 그들의 세계 패권 전략과 직접 맞닿아 있다고 본다. 우선 세계 1위 업체인 GM과의 승부수라는 성격이 강하다. 포드가 대우차 인수에 성공하면 GM을 턱밑까지 바짝 추격할 발판을 확보하게 된다. 성장 시장이라는 아시아에서 GM에 비해 교두보가 허약했던 최대 아킬레스건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대우가 엄청나게 공을 들인 폴란드 FSO 공장을 비롯한 동유럽 네트워크도 확보할 수 있다. 포드에게 대우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M&A 대상’인 것이다. 물론 포드는 세계 다섯 번째로 큰 시장이라는 한국 시장에서도 강력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6월29일은 한국 자동차산업에 역사적 분수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날 한국에서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일단 1년 가까이 한국 경제를 짓눌러온 대우 문제의 가장 큰 매듭이 풀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견해가 우세했지만, 자동차산업 전반으로 눈을 돌리면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성차는 4월 프랑스 르노에 인수되어 7월 말께 법인이 출범할 예정이다. 여기에다 삼성차와 비교할 수 없이 큰 대우차마저 포드에 인수된다면 한국 시장은 그야말로 글로벌 경쟁 체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포드가 대우차를 인수하는 것이 한국 자동차산업에 도움이 될 것이냐에 대해 대체로 유보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우차가 포드의 아시아 하청 생산 기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해외 매각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현실화한다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독자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선 글로벌 경쟁이 가장 격심하게 벌어지는 분야가 바로 자동차 시장이지만, 여기에도 국익은 엄연히 존재한다. 자동차는 흔히 국가의 강력한 상징물로 불린다. 가령 현대차는 하나의 브랜드일 뿐이지만, 그것보다는 한국차로 여겨진다. 실제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자동차는 수출 효자 산업이다. 지난해 자동차 수출 규모는 1백12억 달러에 달했다. 전체 수출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8%로 전자와 섬유에 이어 세 번째이지만, 1990년대 들어 자동차산업의 수출 기여도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자동차를 팔아 벌어들인 무역 수지 흑자 규모는 1백17억 달러. 제조업 총생산의 10%를 차지하는 데다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도 자동차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산업이다. 선진국일수록 예외 없이 갖가지 교묘한 수단을 동원해 자국 차를 보호하려 드는 것도 그만큼 자동차산업이 갖는 경제적·상징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문가들 사이에는, 포드와 르노가 안방에 침투함으로써 국내 자동차산업에 당장 급격한 지각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특히 포드의 경우 부품업체 육성과 브랜드 유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기존 대우 차종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내 대우의 시장 점유율을 1년 후 5∼10% 끌어올릴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본다. 지난해 말 대우차 점유율은 30.9%에 달했지만 6월 말 현재 25% 선으로 떨어져 있다. 르노 역시 현재 삼성차의 점유율 0.2%를 2003년까지 10%로 끌어올릴 작정이다.

앞으로 한국 자동차산업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는 최대 관찰 포인트는 현대자동차. 시장 점유율 75%를 자랑하는 현대차(기아차 포함)가 앞으로도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현대가 앞으로 2∼3년 동안은 시장을 15∼20% 남짓 내주는 선에서 1등 자리를 방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문제는 그 이후다. 포드와 르노가 신차종을 투입하고 자기들의 기술을 대우차·삼성차에 접목하는 상황이 오면 현대는 무척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현대에게 포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르노도 위협적인 상대. 르노의 주표적이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현대의 EF소나타이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생존 전략은 ‘이이제이’

따지고 보면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다임러 크라이슬러를 재촉해 대우차 인수에 나선 것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방어 전략 성격이 강했다. 기술력과 자금력,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세계 1∼2위 업체가 안방에 침투하면 지금껏 누려온 한국 최대 자동차 회사라는 독보적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컸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2년간 현대가 어떻게 변신하느냐에 따라 현대는 물론 한국 자동차산업의 명운이 갈린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안방에서의 협공을 따돌릴 현대차의 생존 전략은 역시 이이제이(以夷制夷). 세계 메이저 업체와 전략적으로 제휴해 메이저와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 협상 과정에서 다임러가 어떤 행태를 보일지가 관건이지만, 세계 3위 업체인 다임러와 8월께 성공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맺을 수 있다면 현대는 일단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임러·미쓰비시와 월드카(연료 절약 및 환경 친화적인 소형 저가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현대차의 활로 모색에 큰 도움이 된다.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에는 생산 능력 4백만대인 ‘빅6’만 살아 남는다는 이른바 ‘국제과점화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자동차 업계의 거대 합병·매수 바람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려는 몸부림이나 다름없다. 1998년과 1999년 다임러 벤츠·크라이슬러 합병과 르노가 닛산을 인수함으로써 초대형 업체 간의 합병·매수 바람은 일단락되었다. 문제는 세계적으로 연간 생산 능력이 100만대가 넘는 13개 사 가운데 GM·포드·다임러·도요타·폴크스바겐·르노 그룹 등 장기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빅6을 빼고 누가 생존할 수 있는가에 있다. 현대(기아 포함)는 푸조·혼다 등과 함께 연간 생산 능력이 3백만대가 안되는 중위 업체일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현대는 자기들이 대우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포드가 현대와 손잡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최근 제휴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것도 포드가 지난해 순익(72억달러)과 맞먹는 인수 가격에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에서 말미암는다.

한국 시장에서 수입차 시장 점유율은 0.2%(2천4백대)에 그친다. 미국과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세계 6대 자동차 생산국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국민이 쳐준 보호막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척박한 광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에게 초국적 거대 자본의 협공은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일 수 있다. 한국차는 30여 년간 어렵사리 쌓아온 독자적 위치를 송두리째 잃느냐, 아니면 메이저 업체로 발돋음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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