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농촌, 과일이 효자
  • 글·사진/밴쿠버·李政勳 기자 ()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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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배·감귤 등 세계 시장 진출 성공…품종 개량·재배 기술 개발·홍보 강화 시급
지난 11월1일 캐나다 밴쿠버 시 무역회관 내 팬퍼시픽호텔에서는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산 사과·배·감귤·단감을 캐나다에 알리기 위한 ‘96 한국 과일 특별 홍보전’이 열린 것이다. 밴쿠버 시 무역협회장이자 캐나다 최대 물류 유통 회사인 H. Y. 루이그룹의 브란트 루이(중국계 캐나다인·중국 이름은 雷震瀛) 회장을 비롯한 청과 도매상 백여 명은 한국산 생과일과 식혜·능금주스, 갈아 만든 배·대추 음료 등 가공 식품을 맛보며 한국산 과일의 우수성을 확인했다. 이튿날에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슈퍼마켓 체인점 ‘세이프 웨이’ 매장에서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한국산 과일 시식회가 열렸다.

농수산물유통공사(유통공사)가 주관하고 농림부가 후원하는 이번 행사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갓 출하된 ‘황금배’였다. 생산량이 적어 국내에서는 아직 맛볼 기회가 드문 황금배는 골덴 사과와 흡사할 정도로 밝은 색깔에 껍질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신고배나 추황배 등은 껍질이 두꺼워 과일을 껍질째 먹는 서양인의 습성에는 적합치 않으나, 황금배는 깎지 않고 그냥 먹을 수 있다.

공급 약속한 물량도 제대로 못대

서양 시장에서 황금배가 경쟁할 상대로는 맛과 외관이 거의 흡사한 일본산 20세기배가 꼽힌다. 일본은 20년대에 품종 개량을 통해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20세기배를 개발하고 대량 생산해 서양 시장을 공략해 왔다. 그러나 이 배는 재배법이 까다로운 것이 약점이다. 과일 성숙기에 습도가 높거나 비가 잦으면 옅은 노란색을 띠는 배 껍질에 일반 배의 껍질 색깔과 같은 황갈색 반점이 생겨난다. 이 반점은 배의 몸체(胴)에 생기는 ‘녹’과 같다고 해서 ‘동녹’이라고 불리는데, 동녹이 많은 배는 상품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20세기배의 성공을 지켜본 한국 농가 가운데 몇몇이 토질과 기후 조건이 유사한 한국에서도 이 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동녹이 심하게 발생해 실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7년 농촌진흥청 과수과는 20세기배와 한국산 신고배를 교배해 새로운 품종 개발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84년 최초로 황금배 종자가 탄생하고, 80년대 후반부터 황금배 묘목이 보급되었다. 황금배 육종에 참여한 농촌진흥청 김휘천 연구관은 “황금배는 20세기배에 비해 재배가 쉽고 맛이 뛰어나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현재 황금배 묘목은 전북 고창의 ‘황금회’(회장 김재훈)라는 단체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고창과 정읍의 배영농조합, 경북 영천의 순배작목회와 김천의 황악작목회 등이 황금배를 생산 출하하고 있다.

91년 유통공사는 황금배 수출 가능성을 타진키 위해 세계 10여 나라에 샘플을 보냈다. 그러자 캐나다 쪽에서 가장 좋은 반응이 왔다. 이에 따라 유통공사가 수출을 대행키로 하고 92년 캐나다의 대표적인 농수산물 수입 회사인 ‘퍼시픽 림’사를 통해 황금배 6t을 수출했다. 이후 수출량이 계속 늘어 96년에는 캐나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3백90t을 선적하기에 이르렀다.

캐나다 시장 개척에는 성공했지만 황금배는 아직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과일 성숙기에 봉지를 씌워 습기와의 접촉을 막아야 하는데, 재배 기술이 미숙해 일본산 20세기배에 비해 동녹 발생률이 높은 편이다. 또 홍보가 부족해 10㎏ 당 49 캐나다달러(약 3만1천원)에 팔리는 20세기배보다 싼 42 캐나다달러(약 2만7천원)에 내놓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재배 농가가 공급키로 약정한 물량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재배 농가는 유통공사에 5백60t을 공급키로 약속했으나 10월 말 현재 47%인 2백60t을 공급하는 데 그쳤다.
일본, 총리·장관 나서 홍보 총력전

이처럼 황금배 공급량이 적은 것은 출하 시기에 추석이 겹치자 농가가 적잖은 황금배를 국내 시장으로 돌린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로는 재배 기술이 부족해 선과(選果) 과정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약 위반에 대해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퍼시픽 림사를 이끌고 있는 이범신 사장은 정 때문에 한국과 거래하는 면이 있다며 “내년에 황금배 5백t을 제때 공급해 준다면 농가 대표를 캐나다로 초청해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까지 하였다.

제주 감귤 또한 서양 시장 진출에 성공한 대표적인 과일이다. ‘만다린’으로 불리며 오렌지와 구분되는 감귤은 까서 먹기 좋은 데다 캐나다의 경우 크리스머스를 앞두고 감귤을 선물하는 풍속이 있어 시장 개척에 유리한 품목이다. 그러나 제주 감귤 역시 캐나다 시장을 선점한 일본 감귤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야 한다.

한국 과일 홍보전에 참석한 제주감귤조합 무역사무소 고순영 소장은 “일본은 총리와 장관, 감귤 생산지 자치단체장 등이 번갈아가며 캐나다를 방문해 경품을 걸고 판촉 활동을 벌여 ‘감귤은 곧 일본산’이라는 등식을 심어주고 있다. 한국도 정부와 감귤 생산자 단체가 함께 판촉 활동을 펼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과일 총소비량은 약 15㎏으로 17∼18㎏에 이르는 유럽과 미주인의 소비량에 근접하고 있다. 이렇게 국내 소비량이 많다 보니 과일 수확기에 출하량이 급증해 가격이 낮아졌다가 단종기에 오르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때문에 제값을 받기 위해서는 장기간 보관하는 시설을 건설해야 하는데, 이러한 창고 건설 비용이 만만치 않다. 때문에 과일을 주스류로 만들어 장기 보관하거나 일정량의 생과일은 해외로 수출해 국내 가격 안정을 꾀할 필요가 있다.

‘96 한국 과일 특별 홍보전’이 끝난 후 황금배 재배 농가와 농림부·유통공사·퍼시픽 림사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뒤풀이가 열렸다. 이번 행사를 통해 일본산 20세기배와 황금배를 비교해 보고 자신감을 얻은 농가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동녹이 심한 황금배는 거둬서 가져가겠다고까지 말하는 등 황금배 수출에 대해 애정을 표시했다. ‘이제 농업은 자기 먹을 것만 생산하는 1차 산업이 아니다. 세계무역기구 체제에서의 농업은 세계 시장을 노리고 벌이는 국제 사업이다’라는 것이 이 자리에서 나온 최종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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