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찍는 ‘이헌재 경제 원론’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월에 정책 청사진 발표…동북아 프로젝트 등 선보일 듯
“귀를 열어놓고 산다.” 지난 2월26일 오전 과천 청사 1동에 마련된 정부 합동 브리핑룸에서 이헌재 경제 부총리(60)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지난 2월20일 첫 정례 브리핑에 이어 두 번째로 언론, 아니 국민 앞에 선 이부총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경제)현황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해결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외부 인사나 부하 직원들의 권고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보스형’이라는 기존 평가가 잘못된 것일까. 이부총리는 ‘경제=심리’이므로 해결 방안에 대해 (경제 주체들과) 컨센서스(합의)를 이룰 필요가 있어 사람을 만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러 경제 지표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는 등 한국 경제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난 것 같지만, 시간을 조금 더 주면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경제 운용) 방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이헌재 구상은 3월 중순께 선보일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 색깔을 유추할 만한 정도로는 흉중을 드러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2월11일 그의 취임 일성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업 활동 활성화였다. 2월22일 취임후 첫 대화 파트너였던 전경련 강신호 회장을 만났을 때도 기업이 어떻게 하면 투자를 늘릴지 탐문하고 투자에 대한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고 한다. 한 경제학자는 “부총리가 재벌에 투자를 구걸하는 인상이다. 기업들은 돈이 벌린다고 판단되면 말려도 투자한다”라고 꼬집었다.

2월26일 브리핑에서도 그는 재차 창업형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벤처 창업에 국한하지 않고 기존 대기업도 독립적 형태로 창업에 나선다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외환 위기 이후 주가나 순이익 관리에만 집착해 투자 확대에 부정적인 이른바 관리형 기업가를 비판한 셈인데, 이부총리는 이들의 득세가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부총리가 기업가(起業家) 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강구하겠다고 밝히자 원래 그와 코드가 맞는 재계는 환영 일색이지만 노동계는 삐딱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동계는 임시직이라도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이부총리의 발언을 문제 삼아 친기업적이라고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이부총리는 “억지로 말하면 친경제적이지 친기업적이 아니다”라고 되받아쳤다.
부동산 대책과 금융 정책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논란이 분분하다. 이 날 브리핑에서도 이부총리는 현재 정책 기조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주택과 토지 투기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급이 안정되어 있다고 판단될 때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투자 활성화를 위해 부동산 관련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재경부 박병원 차관보는 단검과 장검 병행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부총리는 단기적으로 투기억제책을 발동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공급을 늘려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부총리는 이미 토지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으며 6월께 방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월에만 전국 21개 시·군·구가 토지투기지역으로 지정되는 등 투기 붐이 지방으로까지 번지는 마당에 투기를 막으면서 규제를 푼다는 알듯말듯한 원칙이 시장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금융 전문가답게 이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LG카드를 신속히 처리하고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기 위해 은행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2월25일 금융기관장과의 간담회에서 그는 은행장들에게 LG카드 문제를 어떻게 푸는 것이 자기네 은행과 시장 모두에 이익이 되는지를 판단해 달라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부총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협조를 부탁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면서도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게 시장에 개입할 때는 시장 친화적 방법을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롱텀캐피탈 사례를 들기도 했다. 1998년 도산 위기에 빠진 롱텀캐피탈 처리를 둘러싸고 미국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골드만삭스·씨티 등 5대 메이저 투자은행을 불러 자신도 살고 시장도 사는 방법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들이 관련 채권 금융기관을 소집해 불과 40분 만에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금융계에서는 이른바 미국식 시장형 관치가 한국 시장에 자리 잡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다. 이부총리 자신도 지적했듯이 한국 금융기관들은 능력이 부족하다. 또 이부총리 자신은 시장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금융계에서는 그를 ‘관치의 화신’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부총리는 재계는 물론 야당에서도 이례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대통령이 이부총리가 하는 일에 간섭하거나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로 교체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야당의 걱정은 기우로 끝날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 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시간과 권한을 보장받았다는 후문이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불과 3주 만에 과천 관가가 이부총리 중심으로 응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강점인 조직 장악력과 추진력이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카리스마 덕분일까. 이부총리는 이헌재 사단을 몰고 다닌다는 말을 듣는다. 이헌재 사단은 그가 10년 남짓한 공직 생활 기간과 스스로 낭인 생활이라고 표현하는 20여 년 동안 인연을 맺은 인사들을 총칭하는데, 금융계 인사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는 이헌재 사단의 실체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계 인사를 앞두고 언론 등에서 이런저런 인사들이 거론되지만, 이부총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대표적인 이헌재 사단으로 지목되는 김규복 기획관리실장이 용퇴 압력을 받고 물러난 것을 좋은 예로 꼽았다.

경기 회복과 금융 난제를 풀기 위해 돌아온 해결사라고 불리는 이헌재 부총리. 그는 2월26일 브리핑에서 동북아 중심 국가 구축을 위해 외국인 투자자들도 깜짝 놀랄 ‘랜드마크 프로젝트’(이정표적 신사업)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 설명회(IR)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3월 중순께 그의 경제 운용 구상과 함께 이런 프로젝트들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