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뽑은 사외이사 열 사장보다 낫지만…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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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 결정적 역할 가능 경영인 등 2,148명 활동…“제구실 못한다” 76%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 역사에 이정표가 세워질 것인가. 3월12일 SK(주)와 SK텔레콤이 주주총회(주총)를 연다. SK(주)는 소버린자산운용과, SK텔레콤은 참여연대와 사외이사 선임을 놓고 격돌한다.

SK(주) 최태원 회장측과 2대 주주 소버린측은 지난 2월 각각 사외이사 후보 5명을 추천했다. 두 진영은 자기들이 내세운 후보를 사외이사로 앉히기 위해 국내외 기관투자자와 소액주주를 ‘포섭’하는 데 혈안이다.

두 진영이 내세운 후보에 대해 3월3일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내놓은 평가가 흥미롭다. 이 연구소는 소버린측 조동성 서울대 교수와 한승수 의원, SK(주)측 서윤석 이화여대 교수와 오세종 전 장기신용은행장에 대해 선임 반대 의견을 냈다. 한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고, 세 사람은 과거 사외이사로서의 행적 때문이다. 조동성·서윤석 교수와 오세종 전 행장은 지난해 각각 기아자동차와 두산중공업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부실 계열사(현대카드와 두산건설) 지원 의안이 상정된 이사회에서 찬성표를 던져 지배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SK텔레콤 사외이사 선임 건은 SK 오너 일가가 이사진에서 전격 퇴진해 사내이사가 6명에서 4명으로 줄면서 불거졌다. 사내이사와 사외이사가 동수여야 한다는 정관 규정 때문에 주총을 1주일여 앞두고 재선임될 예정이었던 김대식(한양대 교수)·남상구(고려대 교수)·변대규(휴맥스 사장) 사외이사 가운데 2명이 퇴진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경영진이 추천한 변사장과 달리 김교수와 남교수의 거취가 특히 뜨거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3년 전 소액주주(참여연대) 추천으로 SK텔레콤 이사회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사건’은 소액주주운동의 개가였다. 실제로 이들이 나중에 SK텔레콤 이사회가 ‘좋은 이사회’로 변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04년 주총의 최대 이슈는 지배 구조 개선이고 이것의 핵심은 이사회 구성에서 경영진을 감시·견제해야 하는 사외이사 진용을 어떻게 짜느냐이다. 베인앤컴퍼니코리아 박철준 지사장은 “이사회의 50% 이상이 사외이사로 구성되어야 하며, 특히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외이사가 많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유가증권 상장 규정에 따르면, 사외이사는 이사로서 상무(常務)에 종사하지 않는다. 상임(사내) 이사같이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며 법률상 같은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현재 1천1백66개 공개 법인(거래소 상장 법인과 코스닥 등록 법인)에 2천1백48명의 사외이사가 활동하고 있다. 사외이사가 1∼2명인 법인이 82.8%에 달한다. 5명 이상인 기업은 36개, 3.1%(상장 법인은 5.1%)에 불과하다. 사외이사가 가장 많은 회사는 제일은행(15명)이며, 국민은행(12명), KT&G와 하나은행, 신한금융지주, 외환은행 순이다. 사외이사의 전형은 평균 나이가 55.8세에 경상 계열을 전공한 경영인 출신이다. 보수는 천차만별인데, A급인 삼성전자·포스코·KT 등의 사외이사가 4천만원 이상을 받으며 일부 스톡옵션도 받는다. 외국인 프리미엄 때문인지 제프리 존스 미국 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 포스코와 두산 두 군데 사외이사를 따냈으며, 탤런트 김혜수씨가 소망화장품 사외이사로 기용된 것이 이채롭다.

올 주총 대상 법인 5백61개 중 3월3일 현재 일정이 확정된 기업은 4백59개 사(81.8%). 한국 기업들은 금요일에 주총을 여는 것을 좋아하며 특정 일자에 쏠림 현상도 여전하다. 삼성그룹 12개 사가 일제히 주총을 열었던 2월27일에 이어 3월12일과 3월19일에도 대거 주총이 열린다. 12일에는 SK(주) SK텔레콤 포스코 KT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LG전자 등 94개 사가, 19일에는 (주)LG 대한항공 한진 한진해운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 무려 2백1개 사가 무더기로 주총을 연다.

3월 말 올해 주총이 끝나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올 주총에서는 사외이사 29.3%의 임기가 끝나 7백명 가량의 사외이사가 재선임되거나 교체된다. 올해와 내년 두 해 동안 변화 폭이 큰 것은 2001년과 2002년에 사외이사가 많이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법인은 사외이사 임기가 대개 3년이며 은행권은 1년인 것이 특징이다. 3월 중·하순에 몰려 있는 국민은행·우리금융지주·신한금융지주 등 은행권 주총에서 특히 사외이사가 많이 교체될 예정인 것도 그 때문이다.

1998년 정부는 사외이사 선임을 의무화했고, 이후 사외이사 수도 이사진의 25%에서 50%로 늘렸다. 올해는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의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사외이사 수가 50%(동수)에서 과반수 이상으로 늘어난다. 사외이사가 사내이사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의 제도 개선 취지는 초장부터 빛이 바랬다. 기업들이 사외이사 수를 더 늘리기보다 사내이사를 줄이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그랬고 LG전자도 사내이사를 줄여 과반수 규정을 맞출 작정이다.

대기업들은 정부가 요건을 강화해 왔기 때문에 인물난이 심각하다고 주장하지만, 핑계라는 지적도 많다. 가령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1998년 말부터 사외이사 인력뱅크(8백82명 등록)를 가동하고 있는데 기업의 활용이 매우 저조하다. 지금까지 76개 사에 74명이 선임된 것이 고작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정광선 원장은, 한국은 짧은 기간에 원조인 미국에 필적하는 제도를 갖추었지만 운영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독립성 부족을 꼽는다. 지배주주나 경영진 추천에 의해 80% 가까운 사외이사가 선임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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