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소버린의 ‘쿠데타’ 막을 길 막막하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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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경영권 다툼 이겼으나 재대결하면 역전 가능
지난 3월12일 SK그룹과 소버린자산운용이 주주총회에서 벌인 SK㈜ 경영권 다툼은 SK그룹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초 팽팽한 접전이 되리라고 전망한 전문가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SK㈜ 경영권 다툼은 끝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소버린이 경영권을 인수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고 외국인 투자가들의 지분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SK㈜의 경영권 다툼은 SK그룹 전체의 경영권이 걸려 있는 사안인 만큼 경영진은 전체 계열사에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최태원 회장은 손길승 회장·표문수 사장과 함께 최우량 계열사인 SK텔레콤 이사 직을 자진 사퇴하면서까지 배수진을 치고 국내 기관투자가들을 설득했다. SK그룹 계열사 직원들은 전국에 퍼져 있는 소액주주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임장을 받아왔다.

반면 외국인 주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소버린은 시민단체들이 대기업들에 끊임없이 요구하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에 삽입하고 자사 추천 후보를 감사위원에 선임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국내 투자가를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 소액주주 지분은 1.9% 끌어들이는 데 그쳤다. 국내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는 SK그룹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내 세력의 지원에 힘입은 SK그룹은 소버린의 제안을 모두 부결시키고 자사 추천 후보 전원을 이사로 뽑았다. SK그룹이 추천한 조 순·오세종·김태유·서윤석·신현철 후보를 모두 이사로 선임한 것이다.

SK(주)는 지난해 말 주주 명부를 폐쇄해 올해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외국인 지분은 43%에 그쳤다. 그러나 현재 외국인 지분은 55%나 된다. 지난 1~3월에 외국인들이 SK㈜ 지분을 12% 포인트나 늘린 것이다. 따라서 SK㈜ 경영권 다툼은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표 대결을 재개한다면 최태원 회장측은 경영권을 잃을 수도 있다. 임시 주총은 전체 지분의 4분의 1이면 소집할 수 있다. 임시 주총 개최가 여의치 않다고 하더라도 내년 3월 정기 주총에서 재대결이 이루어진다면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욱이 내년 3월에는 최태원 회장의 이사 임기가 끝난다.

주총에서 확인된 SK그룹과 소버린의 우호 세력을 살펴보자. SK그룹의 우호 지분은 SK계열사와 대주주, 산업은행을 합쳐 26.2%이다. 여기에 국민연금(3.6%)을 포함한 기관투자가(7.5%), 국내 시중 은행(4.2%), 소액주주(6% 이상) 등이 SK그룹을 지지했다. 반면 소버린을 제외한 외국인 지분 22% 중 20.8%가 소버린을 지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핵심 쟁점이던 이사 선임에서 나타난 결과를 살펴보면, 49.1% 대 37.7%로 SK그룹이 앞섰다. 하지만 이 세력 판도는 지난해 말 폐쇄된 주주 명부에 나온 것에 불과하다. 지금 따져보면, 외국인 지분이 더 높다. 소버린은 임시 주총을 열 수 있는 명분만 주어지면 쿠데타를 감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SK그룹은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 지배 구조를 꾸준히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SK㈜ 현 경영진의 불법·탈법 경영 행태를 우려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이다. 최태원 회장도 외국인 지분 일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경영권 안정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반면 소버린은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SK㈜의 경영권을 인수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국내 기관투자가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 또 소버린이 국내 경영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국내 투자가들의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국내 투자가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외국인 지분 가운데 이탈하는 세력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처이다. 이를 위해 소버린이 국내 유력 경영인을 전면에 내세울 수도 있다. 기관투자가의 대표 격인 국민연금 관계자는 “소버린이 어떤 식으로 경영할지 예측할 수 없어 기존 경영진에 표를 던졌다”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경영권 확보에 실패한 소버린이 지분을 팔아치우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 적이 있다. 소버린 처지에서 보면 경영권 확보가 어려운 기업에 장기 투자를 하느니 지분 다툼과 실적 개선으로 인해 상당히 오른 주식을 현시점에서 파는 것이 이득이 될 수 있다. 주식 시장에서는 합병·매수(M&A)를 가장해 지분을 매집하다가 기존 대주주에게 프리미엄을 받고 팔아 시세 차익을 노리는 세력이 있다. 금융 시장에서는 이같은 약탈 행위를 그린메일이라고 한다.

소버린이 이 시점에서 지분을 매각하면 당초 의도와 상관없이 그린메일 세력이 되는 셈이다. 정부와 금융 시장 전문가들이 지분 다툼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지난해 초 소버린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소버린은 지분 매각 의도를 강하게 부인한다. 지속적으로 SK㈜ 지분을 유지하며 경영진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SK㈜ 경영진이 의욕적으로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고 기업 지배 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배경에는 소버린의 견제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소버린 같은 적대적 합병·매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우리사주 지분을 높여 주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경영 투명성과 기업 지배 구조 개선에 나서고 있다.

소버린이 한국 대기업의 경영 선진화에 기여하겠다는 숭고한 의지를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소버린은 철저하게 이윤 동기에 따라 SK㈜ 지분을 공개 시장에서 매입한 것이고 SK그룹은 경영권 유지를 위해 자구책 차원에서 경영 선진화에 나선 것이다. 국내 경제 주체들은 SK㈜ 경영권 다툼을 지켜보며 하버드 대학 경제학 교수 맨키가 경제 원리 10선에서 제시한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다’라는 공리를 새삼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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