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라이벌 현대·삼성 전략적 제휴
  • 충남 서산·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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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삼성, 석유화학 분야서 전략적 제휴… 경비 절감 등 효율 극대화 ‘큰 걸음’
현대와 삼성만큼 서로 비난하고 싫어하는 기업 집단도 드물 것이다. 자동차산업에 삼성이 뛰어들었을 때 현대는 이를 격렬히 비난했고, 우주 항공 분야에 현대가 발을 담그자 삼성 역시 현대를 혹독히 비판했다. 해외 시장에서 두 그룹은 무리한 경쟁을 벌이다 국익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두 그룹이 뜻밖의 분야에서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어 관심을 끌고 있다. 그것도 출범 당시부터 앙숙으로 맞섰던 석유화학 분야에서.

88년 8월 삼성그룹이 충남 서산군 대산읍에 삼성종합화학 공장을 착공하고, 그 해 12월 바로 곁에 현대석유화학이 기공식을 가졌을 때만 해도 두 그룹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두 그룹이 비슷한 시기에 석유화학산업에 뛰어든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87∼88년 전국에 있는 주요 산업장은 노사 분규로 몸살을 앓았다. 5공화국 때 흑자 경영을 해 투자 여력이 있던 삼성·현대 그룹은 자본집약적이면서도 노동자를 적게 고용하고 수익성이 높은 사업을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똑같이 석유화학을 키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국내 유화업계는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호황이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 부동의 1위인 LG화학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정부에 ‘신규 투자를 허용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 바람에 정부 정책이 허가제에서 자유화로 바뀌었다. 삼성과 현대는 이 흐름을 타고 석유화학 분야에 진출했다. 그러나 LG화학에 이어 한화·대한유화·호남석유 등 기존 업체가 대거 신규 투자에 나서 당장 공급 과잉을 우려하는 소리가 나왔다.
사사건건 싸움 벌여 출혈

과당 경쟁을 우려한 기존 업체들은 삼성과 현대부터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두 회사는 ‘3년간 생산된 제품의 절반 이상은 반드시 수출한다’는 각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견제를 받는 와중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거의 동시에 공사에 돌입했으니 두 회사의 라이벌 의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두 회사는 공업 용수 문제로 부딪쳤다. 삼성이 삽교호 물을 공급받기로 하자, 현대도 삽교호 물을 공급해 달라며 뛰어들었다. 그러자 삼성이 ‘우리는 먼저 공사를 시작해 공기가 빠른데, 현대와 같이 취수하면 공사가 늦어진다’며 반대했다. 물 싸움은 충남도와 청와대로 비화할 만큼 격렬해졌다. 그 무렵 대호 방조제 물에 여유가 생겨 현대가 대호 물을 끌어다 쓰게 되면서 이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전기 확보 싸움도 치열했다. 삼성이 한국전력으로부터 전력선을 먼저 끌어오자, 현대는 단지 내에 열병합 발전소를 지어 전기 문제를 해결했다.

가장 극단적인 싸움은 부두 시설 공사 때 벌어졌다. 대산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크다. 따라서 육지로부터 1∼2㎞ 정도 다리를 놓은 다음 부두를 건설해야 대형 배들을 접안시킬 수 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은 만큼 공동으로 부두를 건설해 함께 이용하면 좋은데도, 두 회사는 독자적으로 부두 건설을 강행했다.

91년 8월 삼성이 공사를 완료하고, 같은해 10월 현대도 준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때는 석유화학의 호시절이 끝난 다음이었다. 공급 과잉으로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떨어져 두 회사 모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은 ‘사업은 운(運) 7에, 기(技) 3’이라고 했다는데, 두 회사를 살려준 것은 확실히 ‘운’이었다. 94년 여름 일본에 극심한 가뭄이 몰아닥쳐 물을 많이 쓰는 석유화학 공장들이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필립스사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도 폭발 사고가 발생해 공장 가동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석유화학 제품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석유화학 제품은 가격 탄력성이 커서 조금만 물량이 부족해도 값이 급격히 치솟는다. 94년 일련의 사고로 석유화학 제품 품귀 현상이 벌어지자 중국은 생산력에 여유가 있는 한국 업체를 두드렸다. 이 바람에 한국 유화업체들은 중국 시장을 독점에 가까우리만큼 싹쓸이할 수 있었다.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가, 미래를 예측한 선(先) 투자로 전화 위복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었다. 일본 석유화학 업체들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투자를 늘릴 만도 한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투자했다가 생산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면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95,96년을 거쳐 올해까지 유화업계의 ‘화려한 시절’은 계속되어 석유화학 제품은 반도체·자동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석유화학은 자본집약적이라 덩지가 클수록 생산 단가가 내려간다. 일본 업체들은 ‘타도 한국’을 위해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94년 10월 미쓰비시 그룹이 산하 미쓰비시 화성(化成)과 미쓰비시 유화를 통합해 세계 7위 규모의 미쓰비시 화학을 탄생시켰다. 미쓰이 화학과 우베(宇部)흥산도 공장 통합에 나섰다.

유럽과 미주에서도 합병·매수(M&A)가 활발해졌다. 95년 영국 쉘사가 이탈리아의 몬테디손과 합병해 올레핀 분야에서 세계 최대 기업이 되었다. 엑슨은 미국의 UCC와 제휴를 맺고, 영국석유(BP)도 미국 다우사와 손잡았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 유화업계를 긴장시켰다.
파이프라인 설치·항만 건설 공동 추진

올해 초 현대석유화학과 삼성종합화학은 정몽혁씨(36)와 유현식씨(60)를 신임 사장으로 영입했다. 취임식이 있은 얼마 뒤 엔지니어 출신으로 노련한 유현식 삼성 사장이 상견례를 하자며 젊고 의욕에 찬 정몽혁 현대 사장을 초청했는데, 이 날 두 사람은 제휴에 전격 합의했다.

이후 실무진 간의 협상을 통해 양 회사는 파이프라인 설치에 합의했다. 석유화학은 물동량이 많아서 파이프라인이 없으면 가까운 거리라도 배로 운송해야 한다. 삼성과 현대는 나란히 붙어 있음에도 라이벌 의식 때문에 그전까지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지 못했었다. 이어 한 회사 공장에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 다른 회사의 소방대가 출동한다는 것과, 정비 기술자를 지원한다는 것 등에 합의했다. 두 회사는 협소한 부두 시설로 인해 상당량의 제품을 탱크 로리에 실어 인천이나 군산항으로 옮겨 수출해 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회사는 파이프라인 설치가 가능한 거리에 대산항 건설을 추진한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이러한 제휴는 양사 기술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기술자들은 공장 건설 단계 때부터 두 공장 사이에 파이프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경영진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이를 주장하지 못했었다. 이 날 이후 삼성의 탱크 로리 기사들은 현대정유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었고, 현대 직원들 또한 삼성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현대와 삼성 수뇌부는 제휴 관계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릴 생각을 하고 있다. 삼성은 A제품만을 생산하고 현대는 B제품만을 만들어 서로 교환함으로써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까지도 검토하고 있다. 양사 수뇌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 경쟁 업체는 물론이고 일본과 유럽의 동종 업체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 경영에서 누구를 라이벌로 삼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삼성이 현대를 겨누고 현대가 삼성만을 조준했다면, 양사는 작은 싸움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과 유럽의 경쟁자를 주적(主敵)으로 삼아 함께 큰 싸움에 나선다면, 양사 모두 번영하는 상생(相生)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적과도 동침할 수 있다는 현대와 삼성의 윈윈 전략은 위기에 처한 우리 기업이 택할 만한 하나의 생존술이 아닐까.

합병·매수와 업무 제휴를 제때에 시도할 수만 있다면 한보·기아 부도 이후 계속되는 경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맞수 현대와 삼성 간의 전략적 제휴는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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