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국민'이 1달러 아낀들
  • 양동표 (미국 딜로이트 앤드 투시 파트너) ()
  • 승인 1997.12.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뉴욕은 한국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비즈니스 위크>나 <다우 존스 뉴스 서비스> 등 영향력 있는 경제 전문지에 연일 한국의 금융 위기가 보도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뉴욕 타임스>나 <월 스트리트 저널> 같은 주요 일간지에도 한국 사태가 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도되는 것을 보면, 사태의 원인 분석은 물론이고 앞으로 진행될 방향에 대한 예상, 한국이 세워야 할 대책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고 빈틈이 없다. 그래서 세계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 모두가 한국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의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당사자인 한국 사람들만 사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한국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보면, 가정 주부와 어린이들이 해외 여행에서 쓰다 남은 외화 동전을 원화로 바꾸는가 하면, 시민단체는 과소비 풍조와 외국 사치품 사용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또 노동단체는 해외 여행과 외국 유학 등이 현사태의 주범이라면서 화형식을 가졌다고 한다. 참으로 답답하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은행·기업의 ‘짬짜미’ 관행 깨야 산다

쓰다 남은 외화 동전을 원화로 바꾸는 일은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불요불급한 해외 여행이나 도피성 외국 유학을 막으면 그만큼 외화가 절약되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태는 이렇게 감상이나 감정에 치우친 눈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더더구나 감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러한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때로는 국수적인 목소리는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국민의 관점을 오도하여 진정한 해결책에 초점을 맞출 수 없게 하는 것이다.오늘날 한국 사태는 과다한 해외 여행이 야기한 것도 아니고 사치스런 외제품 소비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이는 한국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끌어다가 비생산적이거나 비효율적인 투자에 썼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비효율과 비생산은 당연히 적자를 내고, 빚을 갚기 위해 기업은 더 큰 빚을 끌어다 썼다. 은행은 기업의 상환 능력을 묻지 않고 정부에서 밀어 주는 기업인가 아닌가에 따라 더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 기업은 더 많은 돈을 빌리기 위해서 관계 요로와 금융계 실세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과 상자가 터지게 현금을 넣어 갖고 다니며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여 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한국 금융 시장에는 투명성은커녕 거꾸로 ‘꺾기’라는 이름의 킥백(kick-back)이 판을 치고, 금융기관은 고객의 상환 능력을 검증하기보다는 고객이 어느 귀하신 몸과 친분이 깊은지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기업은 또 다른 빚을 내지 않으면 빚을 갚지 못하게 되고, 은행은 빌려준 돈을 돌려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떼이게 된 악성 대출금 규모가 은행의 턱밑까지 차 올라 익사 직전에 이르렀다. 이것이 어느 한 기업과 한 은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이제는 정부가 보증을 해도 해외에서 돈을 꾸어주겠다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이 맞고 있는 금융 사태의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제통화기금의 도움으로 이러한 파산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초점을 잃어서는 안된다. 기업은 자구 노력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하여 방만한 경영에서 탈피하고, 남의 돈으로 사업하려는 사고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근로자도 생산성 향상이 따르지 않는 임금 인상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은행은 정부의 눈치보다는 고객의 상환 능력을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정부는 은행과 기업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는 안되고, 더더구나 사과 상자를 가져온 사람에게 융자해 주라고 해서는 안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고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분명하다. 다만 정치인에게 이런 해결책을 실천할 의지가 부족했던 것일 뿐이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이라는 외부의 강요에 따라서라도 제도를 개혁하고 파산 상태를 벗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행군은 정작 지금부터다. 관료는 권한을 포기해야 하고 은행은 합병되거나 도산할 것이며 근로자는 직장을 잃을 것이다. 지금부터 감상적으로 반응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전개될 구조 조정 과정은 엄청나게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현명하게 겪어내지 않는다면 국제 경쟁력은 둘째 치고 경제적으로 살아 남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 초점을 흐리지 말라.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