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찌는 지하 경제, 약효 없는 실명제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6.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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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 3년 됐으나 ‘지하 경제’ 못잡아… 당국 “아직 정착 단계, 정책 효과는 미약”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조세연구원이 최근 추정한 95년의 국민총생산(GNP) 대비 지하 경제 규모는 8.9%이다. 이 수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94년에 비해 지하 경제 규모가 되려 0.1%포인트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명제에서도 지하 경제가 건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3년 전인 93년 8월12일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사람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사회 곳곳과 사람들의 실제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지하 경제 규모가 오히려 더 커진 점은, 실명제를 실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궁극적 목표인 조세 형평성 제고와 경제 정의 실현에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질 만하다.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정황에 대해 조세연구원 정영헌 전문연구위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추정치는 통화 지표에 의한 추정 방법인 ‘탄지 방식’을 이용한 것으로, 여러 가지 가정과 제약 조건 아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추정치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이 수치는 ‘추세’를 가늠케 해줄 뿐이다.

현재까지 정부는 실명제를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게 한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지하 경제 축소와 같은 실명제 실시의 본격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정위원은, 금융 거래 정보를 세무 정보에 활용할 수 없는 현재로서는 지하 경제 규모가 크게 줄지 않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금융실명제의 정식 명칭은 ‘금융 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이다.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거래자의 실제 명의 사용을 의무화한 ‘실명제’가 한 축이라면, 철저한 비밀 보장이 또 다른 한 축이다. 자기 이름으로 금융 거래를 하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점과 함께, 불법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힘을 행사하는 데에는 매우 제한을 가해 놓은 것이다. 국세청·감사원·검찰 등에서 ‘검은돈 ’의 흐름을 추적하기가 과거보다 엄청나게 어려워졌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의 반란’을 염두에 둔 이같은 조처 덕분인지 실제로 3년 동안 실명제가 뿌리 내리기에는 상당히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월 말 현재 실명 확인율은 98.2%에 이르고, 비실명(가·차명) 예금의 실명 전환율도 98.7%에 달한 것으로 정부에 보고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금융기관에서 신분증을 보이며 저축하고 송금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실명제에서도 차명은 불가능하지 않다. 실제 돈주인과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 합의한 차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 주인은 나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렸소’하고 밝히고 비실명 예금을 실명으로 전환한 것에도 위장 전환이 상당수 있으리라는 혐의를 두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이런 합의 차명도 올해부터 시행된 금융 소득 종합 과세로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치를 대폭 낮추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세정책연구원 김민호 연구실장은, 한사코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실명제란 불편한 장치일 뿐 넘지 못할 벽이 아니라며, 합의 차명이 가능하므로 음성 자금 조성과 유통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숨겨야 하는 돈이라면 세금이 무섭다고 드러내겠느냐는 것이다.

실명제가 지하 경제 축소에 별반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금융 거래 정보가 과세 자료로 쓰이지 않는 데다 합의 차명이 가능한 ‘치명적인’구조 탓인 것 같다. 정영헌 연구위원은 현재의 실명제가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며, 이런 결함은 10년 후쯤에나 시정될 것으로 보이고, 현재로서는 실명제 안착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재정경제원 이종규 소비세제과장은 실명제에 너무 많은 기대와 환상을 갖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실명제는 그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실명제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이 사실이지만, 3년 동안 실명제의 위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동원 교수(수원대·경제학)는 실명제의 힘이 드러난 단적인 사례로 지난 7월 감사원에 적발된 성업공사 최창현 사장의 비리를 든다. 최사장은 94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섭외성 경비 집행에 사용되는 법인카드를 불법 현금 할인 업소에서 물건을 구입했다고 허위 매출전표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6천7백여만원을 조성해 유관 기관 사람을 접대할 때 거마비나 경조사비에 썼다. 김교수는 정부투자기관장이 오죽했으면 이런 방법으로 자금을 조성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만큼 금융거래가 투명해진 증거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세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세금 측면에서도 실명제의 영향이 나타난다. 실명제 실시 전인 93년 소득세의 탈루 규모가 25.7%에 달했으나 94년 귀속분에서는 이 비율이 16.3%로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 지하 경제인 사금융 시장에서도 실명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 명동에서 10년째 사채 중개업소를 하는 ㄱ씨는 “장사가 안돼 많은 사람이 이미 이 시장을 떠났고, 전통적인 업태인 어음 할인에서 신종 사금융 업태로 전환하거나 전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면서, 자기도 월수입(중개 수수료)이 40% 넘게 줄었다고 털어놓았다. ㄱ씨는 명동 사채시장이 위축된 요인으로, 대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크게 늘렸고, 건설업이 퇴조해 어음 물동량 자체가 줄었으며, 할부금융회사처럼 돈을 비교적 쉽게 꾸어주는 금융기관이 많아진 때문이지만, 실명제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주들은 거개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국세청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거액 전주일수록 정도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지하 경제는 영원하다’

 
실명제는 무자료 상품을 파는 길거리 상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지하도에서 가방 따위 잡화를 파는 ㅂ씨는 장사가 신통치 않다고 말했다. ㅂ씨가 나카마(도매상)를 통해 물건을 사들이기가 어려워졌고, 대형 할인점이 많이 생겨 사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 경제는 영원하다’고 보는 시각 또한 많다. 지하 경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데다 투자한 돈보다 더 큰 몫을 기대하고 행해지기 때문에 이윤율이 높다. 한마디로 돈벌이가 되는 장사다. <국부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돈벌이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분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지하 경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돈벌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상과 지하를 따지지 않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ㅂ씨와 같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상 경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하 경제로 유입되기도 한다. 이런 생계형 지하 경제 참여자는 부패 공무원, 큰손, 부동산 투기꾼 같은 축재형 지하 경제 참여자보다 한층 더 다스리기 어렵다.

지하 경제의 끈질긴 생명력은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도 설명된다. 한국의 대표적 지하 경제인 사채 시장의 경우, 만성적인 자금난으로 제도금융권에서 돈을 구하지 못하는 수요자가 존재하고, 또 제도금융권보다 높은 금리를 받고 돈을 꾸어주려는 공급자가 항상 생기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지하 경제 행위라는 매춘이 상황 변화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존재해온 것도 수요자와 공급자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사원 자문기구인 부정방지대책위원회에 따르면, 94년 한 해 동안 기업들이 조성한 음성 자금은 1조8천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기업 및 금융 담당자들이 지하 경제의 5∼7%(1조3천억∼1조9천억원)가 기업의 음성 자금일 것이라고 답한 인터뷰 결과와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물론 두 방식 모두 막연한 추정이어서 규모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하 경제 더 큰 해악은 탈세보다 ‘국민 분열’

그러나 실명제에서도 여전히 음성 자금을 조성해 정치인·관료 등에게 건네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보호막을 마련하거나 낙찰·수주·특혜 같은 사업상 이권을 따기 위해 음성 자금이 정치 자금·떡값·뇌물 용도로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나라 정부가 암약하는 지하 경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우선 지하 경제가 어떤 상황에서건 탈세로 귀결되는 데다가 해악이 크기 때문이다. 지하 경제가 번창할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의 행정 조직과 세제에 대한 신뢰를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데 있다.

조세 부담의 불공평을 심화시켜 국민의 단결력을 낮추고 소득 분배 정책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생산성도 떨어뜨린다. 이뿐 아니다. 한 나라의 도덕성이 마비된다는 점도 심각한 해악이 아닐 수 없다.

정부로서는 지하 경제가 두통거리일 수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것은 정부가 스스로 지하 경제 생성 요인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 방한했던 지하 경제 분야의 대표적 학자인 비토 탄지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세금과 정부 규제 두 가지를 주요 요인으로 들었다.

세율이 높으면 누구나 탈세를 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세금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공공 지출이 낭비적이라든가 세부담이 불공평하다는 인식이 높을수록 사람들은 지하 경제에 참가하려 든다. 예컨대 유명한 산부인과 병원장이 웬만한 직장인보다도 세금을 적게 냈다든가, 인천 북구청 세금 횡령 사건 같은 것이 드러날 때 지하 경제에 참여하려는 욕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많고 지나치게 힘이 커지면 사람들은 이를 회피하려 들고,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하 경제에 유혹을 느끼게 된다. 미국의 마피아가 세계 최대의 범죄 집단으로 성장한 데에는 20년대 미국에서 시행된 금주법의 덕이 컸다. 금주가 밀주를 낳고, 밀주가 이들을 살찌웠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채가 번성하는 이유도 정부의 지나친 금융 규제 때문이다. 규제는 또 기업들로 하여금 비자금을 조성하게 하고, 이것이 부패 공무원과 만나 거대한 뇌물 수수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치닫는다. 두 전직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로부터 수천억원대의 뇌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이 경쟁 규칙을 만드는 법과 제도를 넘어설 수 있었던 탓이다.

높은 세금 부담과 정부의 지나친 간여가 사람들을 지하 경제로 향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지하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은 경제 발전 수준, 사회 구조, 납세 도의(道義)등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벨기에·덴마크·스웨덴 같은 나라는 세금 부담이 높아 지하 경제가 번창할 소지를 갖고 있지만, 다른 요인이 이를 억제하기 때문에 지하 경제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조세 부담률이 낮은 편인데도 노동시장 같은 다른 요인에 의해 지하 경제가 창궐하는 대표적 나라로 분류된다.

한국의 지하 경제는 어느 특정 부문에 한정되어 있다기보다는 모든 경제 단위·분야·산업·계층에 침투되어 있다. 가계와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도 직간접으로 지하 경제에 관여하고 있으며, 지하 경제의 형태가 다양한 것만큼이나 각 계층이 지하 경제에 연결되어 있다.

조직폭력배·마약사범·도박꾼 같은 범죄자는 물론이고 정치인·관료·사업가·의사·변호사·자영업자·노점상·일용노동자 등 사회의 각계 각층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정 부분 지하 경제에 연루되어 있다. 바른경제동인회 박종규 이사장은 “권력자부터 지하 경제 축소에 모범을 보여야 지하 경제로 흐르는 거센 물꼬를 차단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땅 속의 거대한 ‘경제 괴물’은 싫든 좋든 한국 경제의 한편을 차지한 실체이다. 이 괴물과 대적하는 일은 금융실명제 하나로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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