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류 브랜드 없는 한국의 1류 기업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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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유명해도 1류 브랜드 全無 ‘만년 2류’… 문어발 경영 버리고 전략 상표 개발해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늘 넥타이 하나라도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고 밝혀 왔다. 최근 ‘세계 일류’ ‘월드 베스트’라는 슬로건을 내건 삼성그룹 역시 비슷한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공식으로 선언하느냐 안하느냐 차이가 있을 뿐, 세계 최고 제품은 우리 기업 모두의 꿈이다. 이는 최근 국산 제품의 품질 수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생겨난 목표다.

그러나 해외 여행을 통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상을 실감할 기회가 늘면서, 우리의 수출 상표 전략에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일부 제품의 경우 메이드 인 코리아의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에 육박했지만, 여전히 제 값을 못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충민 교수(한양대·무역학)는 “그 폭이 줄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대부분의 국산 제품들이 품질에 비해 10∼20% 가량 싸게 팔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국산 제품의 품질과 해외 소비자가 국산 제품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간에 격차가 여전히 크다는 것을 뜻한다.

 
품질로 승부하기 한계 부닥쳐


우리나라 수출 소비재 가운데 세계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편(9%)에 속하는 VTR(비디오테이프 리코더)를 예로 들어 보자. 한교수는 한 가전업체의 의뢰로 90년대 들어 이 제품의 해외 시장 가격 추이를 관찰해 왔다(94쪽 도표 참조). 최근 완료된 이 조사에 따르면, 해외 시장에서 국산 VTR의 값은 약 3백50달러(약 28만원).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일본산과는 80달러(6만5천원) 정도 차이가 난다(95년 기준).

순수하게 품질만을 놓고 볼 때 국산 VTR가 해외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금액은 3백80달러. 약 8.6% 정도 제 값을 못받고 있다. 물론 이런 가격 차는 3년 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다. 당시 국산 VTR 값은 3백70달러였으나, 제대로 받았을 경우 4백68달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정상 가격의 26.5%를 못 받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국산 VTR는 여전히 제 값을 못받는 것일까. 한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국산과 일본산의 품질 차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9달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해외 소비자들은 양국 제품의 서로 다른 이미지 때문에 나머지 가격 차인 71달러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이 가격 차이를 개도국이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할 수업료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품질을 높여 수출품의 가격차를 10% 안팎으로 줄일 수는 있어도 그 이상 좁히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VTR 같은 가전제품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일본산 제품과 한국산에 대한 해외 소비자들의 이미지 격차가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땅에 떨어진 국가 이미지 개선 시급

특정 제품 제조국에 대해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제품 이미지에 미치는 효과(원산지 효과)를 심층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부설 유통연구소 연구원 서용구씨는 “이제 메이드 인 코리아가 코리아를 극복해야 할 때가 됐다”라고 말한다. 중·저가 제품 생산국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벗지 않고서는 세계 일류 상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원산지 효과야말로 현재 우리가 처한 수출 정체 문제를 잘 설명해 준다. 세계 일류 상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생산 기지를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각국으로 넓혀나가는 추세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만든 일본산 제품과 국산 제품이 경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원산지 효과의 크기는 전적으로 제품에 달려 있는데, 기능보다 상징이 중시되는 상품에서 그 효과가 크다. 예를 들면 고급 청바지의 경우 개인용컴퓨터(PC)보다 소비자들이 원산지를 더 따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은 한국산 자동차보다 태국산 일본 자동차를 더 선호할 가능성도 높다. 아직 소비재로는 단 한 품목도 세계 최고 제품을 가지지 못한 우리 기업들이 어떤 한계점에 달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 나라에 대해 가지는 소비자들의 이미지는 사실 복잡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 사실과 거리가 먼 경우 또한 많다. 예를 들어 93년 한충민 교수가 외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한국의 대외 이미지와 경제적 파급 효과>)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속한 기후대를 열대나 아열대로 잘못 알고 있는 소비자가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 이는 응답자들이 한국을 막연히 개도국 혹은 후진국으로 여겼고, 이런 나라들이 대체적으로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 있다는 연상 작용에서 말미암았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 이미지는 9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실제보다 저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교수의 연구에서는, 외국 소비자들이 우리나라를 여러 모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알고 있었다. 비록 다른 응답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서용구 연구원의 조사(<소비자들의 국제 상품 인지에 있어서의 원산지 효과>)에서는 스페인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으로 88년 서울올림픽을 떠올렸고, 전처럼 ‘한국전쟁’이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일부 소비재 품질의 경우 세계 최고 수준에 다가섰다고 믿는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불만스런 결과이다.

물론 우리나라 제품의 이미지는 개도국이나 후진국에서는 한결 낫다. 예들 들어 필리핀 가전제품 시장에서는 일본의 소니와 우리나라의 LG가 비슷한 인지도를 보이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 가전 3사가 시장을 분할 점령한 상태다. 중국에서의 롯데껌, 인도와 중남미에서 대우의 이미지 역시 좋은 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우리 기업들이 이 시장들을 집중 공략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기업들은 90년대 들어 세계 일류 제품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틈새 시장(niche market)을 공략하는 데 주력해 왔다. 한충민 교수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저가 의류나 신발 제품부터 시작했던 선진국 시장에서와는 달리 개도국이나 후진국에서 우리 기업들은 품질이 어느 정도 통하는 제품으로 신선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선진국 시장을 어떻게 다시 공략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 ‘행세’하려 애쓰기도

선진국 소비자들에게 통하는 세계 최고의 상표는 사실 몇몇 선진국이 독점하고 있다. 세계 20대 상표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스위스 다섯 나라인데(93쪽 표 참조) 이는 그만큼 국가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 이미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업 혼자서 바꿀 수도 없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일본과 프랑스처럼 체계적으로 해외 홍보 전략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국제 뉴스에서 초점이 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중요 이벤트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서연구원의 조언이다(95쪽 딸린 기사 참조).

 
낮은 국가 이미지로 인한 수출 애로를 타개하려는 기업들의 대응 전략은 다양하다. 심지어 국내의 한 그룹은 한국 기업이 아니라 일본 기업이라는 인상을 소비자에게 심으려고 노력한다는 혐의를 받기도 한다. 경쟁업체의 한 임원은 외국 잡지의 일본 특별 광고 지면에서 국내 기업 광고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수출 상표 전략에 혼선이 빚어지는 또 한 가지 원인은, 한 그룹이 수출하는 제품의 종류가 다양하기 그지없는 재벌 구조 탓도 있다. 서연구원의 조사에서도, 한국 하면 떠오르는 기업으로는 `‘샘성(SAMSUNG)과 ‘현다이(HYUNDAI)’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정작 이들의 대표 상품은 제대로 대지 못하는 응답자가 많았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 중화학공업 제품이어서 일반 소비자들과 가깝지 않다는 것 역시 한국산 제품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높아지지 않는 이유다. 소비자들은 패션 상품이나 자동차처럼 상징성이 큰 제품을 통해 어떤 나라 제품과 그 나라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오랜 수출 관행이던 주문자 상표 부착(OEM) 방식에 의한 수출 역시 폐해가 장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70년대 일본의 두 자동차 제조업체가 좋은 예다. 당시 미쓰비시는 미국 크라이슬러에 콜트라는 상표를 붙여 OEM 수출을 했는데, 그 때문에 미국에서 이 회사의 인지도는 아직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독자 상표로 승부를 걸었던 혼다사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은, 이전까지 우리 기업들이 업체 이름 알리기에 치중한 나머지 상표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등한시했기 때문인 셈이다. “<포춘>이 선정한 5백대 기업하면 국내 업체가 몇 끼지만, 세계 5백대 상표 하면 국내 제품은 하나도 끼지 못한다.” 한국상표자료센터 이상민 브랜드전략기획실장의 말이다.

우리 기업의 고민은 이제 해외 시장에 그나마 알려진 그룹명을 고집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상표를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상표를 만드는 것은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 일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대부분의 상표 전문가들은 당장 그래야 한다고 믿는 눈치다.

우리나라나 우리나라의 그룹 이름이 외국에 상당히 알려지고는 있지만,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는 얘기다. 다시 이상민 실장의 말. “국내의 예이기는 하지만, 하이트 맥주의 성공에서 배워야 한다. 크라운맥주가 만년 2위라는 인상이 강한 상황에서 맥주의 이름을 크라운 하이트라고 했다면, 업계 최고의 맥주 상표를 만드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해외 지향적인 상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현대(HYUNDAI)라는 상표는 발음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다르게 발음하는 탓에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프랑스에서는 ‘윈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처음 이 발음을 들었을 때 현대로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반면 소니(SONY)나 도요타(TOYOTA), 혼다(HONDA)에는 이런 문제가 전혀 없다. 한 전문가는 “영어 발음이 가능한 상표에 눈을 돌릴 때가 됐다”라고 지적한다.

세계적인 상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수출 상품이 제 값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기업과 정부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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