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권'과 '경쟁력'이 맞붙은 한국통신 사태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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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신 노조, 경쟁체제 도입 등에 ‘위기감’…정부, 노조의 정책 참견에 ‘강공’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가 81년 12월 설립 이래 최대 시련에 직면했다. 단일 노조로는 국내 최대(5만2천여 명)인 이 회사 노동조합이 5월26일부터 ‘준법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한국통신 노조는 준법 투쟁을 시작했으나, 정부와 사측이 자기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차 강도를 높일 계획이어서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극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한국통신 사태는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컴퓨터 통신인 하이텔의 대화방에 ‘만약 전화국이 파업한다면???’이라는 주제가 떠오르자 2주일 사이에 백여 건의 의견이 올라와 열띤 관심을 보여주었다. 20대 젊은층이 주도하는 이 가상 공간에는 한국통신 노조를 지지하는 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국민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통신 대란’에 대한 우려와, 정부와 사측의 강경 대응 의지를 담은 언론 보도가 연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노조, 통신정책 놓고 사사건건 대립

그러나 한국통신 사태의 핵심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민들은 한국통신이 어떤 회사인지 잘 모르고 있다. 또 노사 간에 극단적인 마찰이 초래된 이유와, 파업 조짐이 일기도 전에 정부가 초강수 대응에 나선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통신은 전화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종합통신사업자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시내·시외 전화와 국제 전화를 망라한 전화 사업자이며, 하이텔 등의 정보통신 사업과 기업통신 사업, 위성통신 사업을 하는 한국 통신업계의 ‘맏형’이다. 81년 12월 체신부(현 정보통신부)로부터 공중 전기통신 업무를 넘겨받아 국영 기업에서 공사 형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한국통신은 곧잘 한국전력공사(한전)와 비교된다. 94년 매출액이 5조5천4백억원으로 한전에 이어 두 번째로 외형이 크다. 종업원 수로는 국내 최대 회사이다. 95년 4월 말 현재 6만2천2백11명으로, 한전보다 두배 가량 많다.

이번 사태가 파괴력을 지닌 것은 한국통신이 거대 기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통신이 국가 기간 통신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중 전화망인 시내 전화망이다. 가정마다 연결된 시내 전화망을 거치지 않으면 국민은 어떤 통신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 모든 통신이 시내 전화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한국통신은 시내 전화망을 갖지 않은 데이콤이나 한국이동통신 같은 다른 통신사업자와 본질에서 다르다.

한국통신 사태는 쉽사리 타결점을 찾지 못할 전망이다. 워낙 양측의 입장 차이가 크고 감정도 격앙돼 있기 때문이다. 현 한국통신 노조 집행부는 94년 5월 출범한 후 통신사업 구조개편과 관련해 사측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켜 왔지만, 이번 사태는 사측의 고소 고발과 징계 조처가 발단이 됐다. 4월25일 사측은 유덕상 노조위원장(41) 등 노조 간부 64명을 서울지방경찰청에 고발한 데 이어 5월17일 이들을 파면·중징계하겠다고 발표했다. 노조측은 “노사가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지사를 들어 사측이 조합 간부를 고발·파면하겠다고 한 것은 명백한 노조 탄압이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통신 노조의 요구 사항은 크게 두 가지이다. 임금 인상·통신 정책과 관련한 사안이다. 노조는 한국통신 임금 수준이 20개 정부 투자 기관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올해 기본급 정액 8만원 인상과 초과근무수당 기본급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측과 정부는, 한국통신 임금이 정부투자기관 중상위 수준이며 기본급 8만원 인상은 그 자체가 13.2%의 인상률을 가져 올 뿐더러 상여금과 각종 수당에 영향을 줘 무려 37.4%의 인상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했다. 올해 민간기업 임금 가이드 라인인 5.6∼8.6%를 훨씬 웃돌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통신의 최대 주주인 정부가 내심 더 강경한 것은 통신 정책에 대한 노조의 요구이다. 정부는 이를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정부는 민영화와 통신시장 개방, 경쟁체제 도입 같은 통신 정책은 본질적으로 노조가 제기할 사안이 아니므로, 한국통신 노조 운동이 정치 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이번 사태는 통신 정책의 방향과 한국통신의 자리매김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보통신부는 94년 6월에 통신사업 구조개편안을 마련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간 기본통신 협상이 예정대로 96년 4월에 끝나면 한국은 개방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빗장을 열기 전에 국내 통신사업자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데,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경쟁체제 도입이다. 이미 91년 12월에 국제 전화 부문에서 데이콤을 제2 사업자로 지정해 경쟁체제가 도입됐다. 시외 전화 부문도 데이콤이 제2의 사업자로 지정돼 내년에는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제3의 시외 사업자가 나오면 이 사업자는 국제 전화 부문도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 독점을 누렸던 한국통신으로서는 피를 말리는 싸움인 경쟁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인 박탈감과 피해 의식이 클 수밖에 없다.

통신산업 경쟁력 강화에 대한 정부와 한국통신 노조의 처방전은 매우 다르다. 이것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노조는,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미명으로 한국통신을 재벌에 분양하기보다는 한국통신의 손발을 묶는 규제부터 푸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정부의 규제가 비효율과 경쟁력 약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통신 전문가 사이에서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한국통신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것이 틀림없지만 경쟁체제 도입에 대해서는 찬성론이 우세하다. 경쟁체제 도입이 개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길이며 한국통신을 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국통신의 민영화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통신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공기업 형태로는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비효율을 털어버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정부는 이미 정부가 가진 지분을 20% 팔아 현재는 80%를 갖고 있다. 정부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매각하며 한국통신의 경영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갈지 고심하고 있다. 정부는 94년 4월 이 과제를 서울대 경영연구소·삼일회계법인·안진경영연구원으로 구성된 용역팀에 연구를 의뢰했다. 한국통신 경영진단반장인 정보통신부 이성해 정보통신지원국장은 “외부 용역팀의 작업이 6월 말께 끝나면 이 연구 보고서를 토대로 종합적인 민영화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 와중에서 민영화와는 별도로 한국통신 분할론이 고개를 드는 것도 주목거리다. 서비스 분야나 기능 별로 한국통신을 분리하자는 방안이다. 한국통신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수상쩍은 의도라는 오비이락 격의 해석이 있지만, 분할론은 과거에도 있었고 외부 용역팀에서도 연구한 바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외부 용역팀의 한 관계자는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선로 유지 보수와 114 전화 안내를 한국통신에서 떼어내는 기능별 분리 방안은 검토할 만하다”고 밝혔다. 용역팀은 서비스 분야(시내·시외·국제 전화, 부가통신)를 분리하는 것은 시너지(상승작용) 효과가 약해진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분할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통신개발연구원의 조 신 연구위원은 “몇년 전까지도 세계 통신업계에는 분할론이 득세했으나 현재는 통합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통신을 분할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보통신부 이성해 국장은 “정부는 한국통신 조직에 대해 어떤 조처도 검토하고 있지 않다. 분할론은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혔다. 통신사업 구조개편 방안을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정보통신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서비스 별로 독립채산제를 채택해 내부 경쟁을 강화하자는 안이 정책으로 채택될 공산이 있다”고 말했다. 사업부를 하나의 독립된 회사 조직으로 보는 것으로, 한국통신을 그룹화하자는 발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한국통신도 부정적이지는 않다. 한국통신 경영전략실 서용희 국장은 “정산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사업부 독립채산제에 대해 큰 반대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통신은 한국에서 가장 큰 통신사업자이지만 외국의 거대 사업자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한국통신은 가입자 수로는 세계 12위이지만, 매출액 기준으로는 세계 23위, 자산 기준으로는 31위에 불과하다. 외국의 거대 사업자들은 통신 서비스에서 더 나아가 통신기기 제조, 신용카드업, 심지어 광고나 건설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한국통신은 통신서비스에 머물고 있어 이들 외국 사업자와 비교한다는 자체에 무리가 있다. 정보통신 분야는 유·무선 결합에 따른 통신사업 영역 붕괴로 상호 진출이 활발하다. 멀티 미디어 시대로 이미 진전되고 있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한국이 뒤지지 않기 위해서도 핵심 사업자인 한국통신의 위상 강화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국통신은 한국전화번호부 등 자회사 6개와 연구기관 6개를 거느리고 있다. 그동안의 공도 적지 않다. 80년대 극심한 전화 적체 현상을 빠른 시간에 해결했으며, 첨단 통신기술 연구를 위해 매년 수천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한국통신은 국내 경쟁체제 도입과 통신시장 개방, 민영화라는 ‘삼각 파도’ 속에서 노사 마찰이라는 또 하나의 거센 파도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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