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신화’는 한국 자동차의 스승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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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시장 점유율 곤두박질, 최대 위기 맞아…RV 자동차 개발로 재기 성공
기아자동차 사태는 일본의 자동차업계 처지에서도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일본 언론들도 기아 사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편이다. 일본이 이웃 나라 한국에서 벌어지는 기아자동차 사태에 이처럼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배경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의 자동차업계는 기아자동차와 인도네시아 TPN사가 국민차 합작 생산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유럽의 자동차회사들과 함께 세계무역기구(WTO)에 무역 관행 위반으로 제소한 바 있다. 세계무역기구 분쟁처리기관은 지난 6월 중순 이 제소를 받아들여 분쟁처리소위원회 설치를 승인했다.

이런 와중에서 들려오는 기아자동차 부도 소식은 일본의 자동차업계로서는 큰 낭보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기아자동차 사태가 오래갈 경우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생산 계획이 변경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비화한다면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은 기아를 대신해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생산을 가로챌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는 셈이다.

일본의 내수 시장 경쟁, 한국 못지않게 치열

일본의 자동차업계는 5대 자동차 메이커의 하나인 마쓰다 자동차의 경영권이 경영 부진으로 작년 5월 포드 자동차에 넘어간 충격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쓰다 자동차는 7년 전만 해도 일본 국내 시장 점유율이 8.4%인 3위 메이커였다. 그러나 과도한 설비 확장과 그 뒤에 불어닥친 거품 경제의 파탄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쓰다의 자력 갱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거래 은행들은 처음에는 일본 국내 자동차 회사와의 합병을 모색했다. 그러나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마쓰다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설비 확장과 판매 부진에 시달려 마쓰다를 인수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진작부터 자본 제휴 관계이던 포드 자동차와 맞선을 보게 되었고, 포드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포석으로 마쓰다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러나 정작 마쓰다의 경영권이 포드로 넘어가자 일본의 자동차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시장에서 ‘빅 3’을 코너에 몰아넣었다고 자만하던 것이 엊그제 일인데 역으로 그들의 자본이 자신들의 정원을 침범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는 바로 그런 포드·마쓰다와 자본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 만약 기아자동차 사태 해결에 포드나 마쓰다가 관여하게 된다면 일본 자동차업계와도 무관한 일은 결코 아니다. 포드·마쓰다·기아라는 3국 다국적군이 편성될 경우 67년 이후 11개 회사 체제를 유지해온 일본 자동차업계는 어떤 형태로든지 재편성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 사태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도 7백만대에 불과한 내수 시장을 놓고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어, 뼈를 깎는 판매 전쟁을 벌여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만일 이 전쟁에서 밀리게 되면 언제 마쓰다나 기아자동차 신세로 전락할지 모를 일이다.

혼다 자동차가 좋은 예이다. 혼다 자동차는 자동차 수리업을 하던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가 50년 전 고향 하마마쓰에서 자본금 백만엔으로 ‘혼다기술연구소’를 차린 것이 출발점이다. 기술자 출신인 혼다는 처음에는 자전거에 조그만 동력을 단 ‘바타바타’라는 제품을 개발해 크게 히트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혼다는 오토바이 생산에 뛰어들어 12년 만에 세계 시장을 석권함으로써 이른바 ‘혼다 신화’를 만들어 냈다.

오토바이의 세계적 메이커로 성장한 혼다 자동차가 통산성의 반대를 뿌리치고 승용차 생산에 뛰어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일이다. 당시 통산성은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동차 업계를 세 그룹(승용차·경자동차·특수차)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터라 혼다의 승용차 진출을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혼다 소이치로는 2륜 자동차로 세계를 석권한 회사가 4륜 자동차를 못 만들 이유가 없다고 고집하면서 63년 승용차 생산을 강행했다.
불황 된서리 맞은 ‘기술 제일주의’

‘남이 하는 일은 절대로 흉내내지 말라’는 혼다 소이치로의 철저한 기술 제일주의는, 혼다 자동차가 승용차 생산에 뛰어든 지 20여 년 만에 도요타·닛산에 이은 제3의 메이커로 떠오른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의 자동차 회사로서는 맨 먼저 미국에 진출해 어코드·시빅 같은 베스트셀러 카를 내놓아 미국 시장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혼다는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부딪치게 되었다. 우선 어코드·시빅과 같이 도시 지역이나 젊은층에게 어필할 후속 차를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 또 좋은 차를 만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고객은 뒤따라오게 마련이라는 판매 전략이 불황기를 맞으면서 재고를 산더미처럼 늘려 놓았다. 이 모두가 혼다 자동차의 기술 제일주의가 스스로 판 함정이었다.

혼다 자동차는 이에 따라 회사 설립 이래 처음으로 3년 연속 매출액과 이익이 대폭 감소하는 경영 위기를 맞이했다. 89년 7.9%까지 올라갔던 시장 점유율도 94년에는 6.4%로 곤두박질치며 마쓰다에 이은 제5의 메이커로 전락했다.

경영 악화가 계속되자 당시 3위 메이커였던 미쓰비시 자동차와의 합병설도 흘러나왔다. 혼다는 승용차 부문과 해외에서 강하고, 미쓰비시는 레저용 RV(Recreational Vechicle) 자동차와 국내 시장에서 강하기 때문에 두 회사가 합치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회사의 주거래 은행이 당시 미쓰비시 은행이었던 것도 그런 합병설을 부추겼다.

그러나 굴욕적인 합병 얘기가 흘러나온 지 3년이 채 안되어 혼다 자동차는 극적으로 다시 일어섰다. 일본자동차공업회의 최근 통계에 의하면, 혼다 자동차는 96년에 승용차 약 78만 대를 팔아 도요타·닛산에 이어 제3의 메이커 자리를 탈환했다. 한때 6.4%까지 추락했던 시장 점유율도 승용차 생산에 뛰어든 이래 처음으로 10%대를 넘어섰으며, 영업 이익도 사상 최고인 2천억엔을 돌파했다.

혼다 자동차가 이처럼 극적인 재생을 이룩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혼다 자동차 4륜사업본부 개발기획실 스기야마 도모유키(杉山智之) 개발주간에 의하면, 혼다 기적의 열쇠는 한마디로 94년부터 본격 판매한 RV 자동차가 대히트한 데 있다고 한다.

혼다 자동차 주공장인 사야마·스즈카 공장에는 본래 프레르드·어코드·레전드와 같은 일반 승용차 생산 라인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불이 붙은 RV 자동차 붐이 일본으로 옮겨 붙자 혼다 자동차도 RV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기로 작정하고 일반 승용차 생산 라인에서도 조립이 가능한 RV 자동차 ‘오디세이’를 92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했다.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차체가 낮은 생산 라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혼다의 공장에서 차체가 높은 RV 생산은 무리라는 의견이 대두했다. RV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공장을 따로 짓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공장을 새로 짓거나 기존 생산 라인을 대폭 개조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소비자 마음 사로잡은 ‘효자 상품’ 탄생

그래서 혼다측은 생산 현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존 라인에서도 조립이 가능하도록 오디세이의 규격을 다시 뜯어고쳤다. 스기야마 주간에 의하면, 연구소가 개발한 차체 디자인이 생산 현장에 의해 뜯어고쳐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수백억 엔이 소요될 공장 개조비가 70억엔으로 해결되었다.

혼다 자동차의 RV 자동차 오디세이는 판매 개시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2년간 월 만대 이상씩 팔리는 초히트 상품이 되었다. 또 뒤이어 개발한 스탭 왜건, CR-V, S-MX와 같은 RV 자동차도 오디세이 못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어 혼다 자동차의 재생을 반석처럼 굳혀 주는 효자 상품이 되어 있다. 기자가 주력 공장의 하나인 사야마 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일반 승용차 라인은 하루 8시간 생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RV 생산 라인인 넘버 1 라인은 하루 2교대제로 풀가동하고 있었다.

일본자동차공업회의 한 내부 자료는 기아자동차의 경영이 악화한 요인을 소비자를 생각지 않은 상품 개발, 무리한 투자 확대, 노사 대립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현재의 기아자동차는 3년 전의 혼다 자동차보다는 80년대 중반 닛산 자동차의 경우와 더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아의 ‘타산지석’은 닛산의 사내 개혁

닛산은 70년대만 해도 시장 점유율이 30%대를 웃돌아 거인 도요타와 막상막하의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력이 강해진 노조의 경영·인사 개입, 영국 등 해외에 대한 무리한 투자, 고객보다는 상사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제품 개발 풍토 등 몇 가지 요인이 복합 작용하여 86년 9월 상장 이래 처음으로 1백97억엔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당시의 구메 사장은 24년간 ‘노조의 천황’으로 군림해 온 시오미치 위원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 뒤 사내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여 경영 위기에 빠진 닛산 자동차를 재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건에 성공한 혼다나 닛산 자동차 임원실이 큰 방에 칸막이만 쳐져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지옥과 같은 경영 위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영진부터 의식을 개혁하자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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