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구조조정 논란 불씨 꺼졌나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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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산업 구조 조정, 삼성 신차 판매 시작하면 다시 논의될 듯
‘한국 자동차산업은 합병·매수(M&A)를 통해 구조 조정이 될 수밖에 없다.’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5월10일자에서 지적한 말이다. 이 시사 주간지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지난해에만 69만대를 과잉 생산했다. 생산 설비 가동률은 올해 72% 수준이다. 생산 능력이 6백40만대에 이르는 2001년에는 가동률이 55%로 떨어진다. 국내 자동차 제조 업체가 가진 생산 설비의 절반 가량이 개점 휴업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들여온 기계가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 채 멈추어 있으면 감가상각 비용만 발생시켜 고정 비용이 늘어난다. 또 재고를 처분하기 위해 자동차 업체들이 앞다투어 무이자 할부 판매나 덤핑 같은 출혈 경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 업체 대부분이 적자에 시달리고 부채 비율이 높아져 견디지 못한 기업부터 하나씩 쓰러진다. 도산한 업체는 살아 남은 다른 업체들이 합병·매수를 통해 흡수할 수밖에 없다.’ 이 전망은 자동차 업계가 앞으로 5년 이내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이다. 어찌 보면 시장 경제 원리에 충실한 산업 구조 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아 소생했지만, 구조적 문제 하나도 해결 안돼

문제는 자동차산업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고 자동차산업 자체가 시설 투자 비용과 산업 전반에 미치는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자동차 업체가 하나라도 무너지게 되면 투자 손실이 지나치게 크고 협력 업체의 잇단 도산으로 국민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치권이나 거시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경제 부처 관리들은 자동차 업체의 도산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지난달 하순 연쇄 부도 위기에 처한 기아그룹이 극적으로 회생하는 과정에서 이 논리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 6월16일 신한종합금융사를 비롯해 5개 종합금융사가 아시아자동차가 발행한 어음 8백40억원을 한꺼번에 돌렸다. 아시아자동차는 이를 영업 마감 시간까지 결제하지 못했다. 기아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도 나 몰라라 하며 종합금융사의 어음 결제를 거부했다. 종합금융사는 어쩔 수 없이 밤 10시가 되어서야 만기 어음을 3개월 연장했다.

1차 부도 위기를 모면한 기아그룹이 안도의 숨을 쉬기에는 아직 일렀다. 맨 먼저 기아그룹을 긴장시킨 곳은 주식 시장이다. 이미 삼성자동차가 작성한 보고서가 유포되면서 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에 대한 제2 금융권의 불안이 수면 위에 떠올랐다. 자동차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은 기아그룹 전체의 자금 악화설로 이어져 기아그룹 계열사의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시중 은행들도 추가 여신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종합금융사들은 여차하면 ‘털고’나오겠다는 태세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기아그룹이 마지막으로 매달린 곳이 바로 재정경제원이었다. 기아그룹 김선홍 회장은 6월23일 오후 강경식 경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을 만나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바로 다음날 산업은행은 기아특수강에 3백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제일은행은 신탁 계정에서 기아그룹 어음을 매수할 뜻을 밝혔고, 종합금융사도 자금 지원을 재개했다.

김선홍 회장이 강부총리를 면담하는 자리에 배석한 재경원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은 “강부총리는 금융권에 특정 기업을 살려주라 마라 할 처지가 아니다. 다만 경영 여건과 재무 구조를 보아 쓰러지지 않을 기업이 쓰러졌을 때 그 책임을 금융권이 져야 한다는 원칙만 주지시켰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강부총리의 입장을 전해들은 금융권이 알아서 조처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평소 시장 경쟁 원리를 강조한 강부총리가 입장을 선회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재경원 안팎에서 일고 있다. 강부총리의 최측근도 강부총리가 기아그룹 도산이 초래할 국민 경제의 위기를 감안해 평소 소신에서 한발짝 물러섰다는 점을 인정했다.

기아그룹은 일단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자동차산업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내수 시장에서는 올해 들어 자동차에 대한 신규 수요가 급격히 줄고 있고, 전세계 자동차 시장도 세계 유명 업체들의 합병·매수가 거론될 정도로 공급 과잉 사태를 맞고 있다. 자동차 업체는 이미 내수 시장에서 무이자 할부 판매를 시행하고 있다. 게다가 내년에는 삼성자동차가 중형 자동차 8만대를 시장에 쏟아내기 때문에 자동차 업체 사이의 판매 경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 뻔하다.
정부 “뚜렷한 해결책 없다”

기존 자동차 업체의 재무 구조도 지난해에 비해 전반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기아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의 부채 비율은 경쟁 업체인 대우자동차나 쌍용자동차보다 오히려 낮은 편이다. 기아자동차의 부채 비율이 400%를 조금 웃도는 데 비해 대우자동차는 600%에 근접하고 있고 쌍용자동차는 만%를 넘기고 있다.

그런데도 왜 기아그룹만 자금난에 시달릴까. 기아그룹은 다른 재벌과 달리 문어발식 기업 확장을 자제하면서 자동차 업종이라는 한 우물만 판 업체이다. 바로 그 점이 기아그룹의 발목을 잡고 있는 덫이다. 다른 자동차 업체는 수많은 사업 분야를 거느린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에 불과한 데 비해, 기아자동차는 전체 그룹의 주력 업종이며 그룹 매출의 절대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 부문이 어려우면 그룹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반면 대우자동차는 대규모 해외 투자로 자동차 부문의 규모를 키우고 있지만, 대우그룹의 다른 계열사가 자금 지원이나 상호 지급 보증을 해주기 때문에 자금 동원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덜하다.

재경원의 한 고위 관리는, 기아가 망하면 우리나라 경제 풍토에서 기업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문어발식 경영이 최선이라는 그릇된 통념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바로 이 점이 기아그룹을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귀띔한다. 재경원의 기아 살리기 과정에서 덕을 본 업체가 쌍용자동차이다. 형평 문제를 우려한 정부와 은행권은 쌍용그룹에 대해서도 자금 지원을 재개했다. 쌍용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은 7월1일 여신 2백억원과 기업어음 2백억원어치를 매입해 총 4백억원을 지원했다.

기아그룹과 쌍용그룹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 지원이 재개되면서 자동차산업 구조 조정에 관한 논의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 논의는 언제든지 다시 떠오를 수 있다. 특히 삼성자동차가 내년에 신차를 판매하기 시작하면 구조 조정 문제는 다시 불거질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기아그룹이 위기를 모면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재경원이 이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이나 복안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재경원의 한 고위 관리는 “뚜렷한 해결책이 있겠는가. 특정 기업에게 자동차산업을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고, 설사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이 민간 산업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통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아그룹과 쌍용그룹에 대한 자금 지원으로 자동차 업계가 직면한 어려움을 잠시 덜어준 정부의 정책은 궁여지책이라 할 수 있다. 즉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중병환자에게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를 투약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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