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제당, 삼성에 ‘무한경쟁’ 선언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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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출자 지분 정리 않고 서둘러 독립 시도… 영상사업·유통·레저 분야서 격돌 불가피
제일제당의 독립 선언이 임박했다. 이 회사는 93년부터 모그룹이던 삼성그룹과 결별하겠다고 예고해온 터라, 이 소식 자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선언 방식이다. 어떤 그룹으로부터 한 계열사 혹은 몇몇 계열사가 떨어져 나갈 경우 양측이 서로 출자한 지분을 점차 해소해 나가는 것이 통상적 절차이다. 공정거래위는 이에 따라 이 회사들을 그룹 계열사에서 제외해 발표하게 된다.

삼성그룹은 이미 이런 절차를 거쳐 한솔그룹과 신세계백화점을 분리했다. 그런데 제일제당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상호 출자 지분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제일제당이 아직도 삼성그룹의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분리를 허용하지 않은 상태다. 공정거래위는 지난 4월 초 제일제당을 삼성그룹에 포함시킨 ‘30대 대기업 집단’을 이미 발표했다.

“주식 보유하되 경영권 행사 않겠다”

공정거래위의 이런 조처에도 불구하고 제일제당은 독립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상징적 조처의 하나로 이 회사는 자사가 갖고 있는 삼성그룹 주식에 대한 경영권 행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주식을 가지고 있되 활용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증권업계의 추정에 따르면, 제일제당은 삼성그룹 주력 기업들의 주식을 적게는 1%에서 많게는 20% 가까이 가지고 있다(삼성 계열사가 보유한 제일제당 지분은 거의 해소되었다. 자세한 내역은 오른쪽 도표 참조).

제일제당이 이 주식을 삼성그룹측에 넘기지 않는 것은, 양쪽이 비상장 종목의 가격에 합의를 보지 못해서라고 알려진다. 예를 들어 제일제당이 전체 발행 주식의 11.5%를 가지고 있는 삼성생명의 경우, 삼성측은 공인회계사 산정 가격인 주당 5만원을 제시했다. 반면 제일제당은 상장할 경우 주가가 당장이라도 50만원을 호가할 것으로 본다.

제일제당은 또 독립 그룹으로서 기업 이미지(CI)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룹명을 사내에서 공모했으며 그 결과 ‘제일제당그룹’이 유력해 보인다. 이 회사는 5월1일 대대적인 행사를 통해 새 이름과 로고를 선보일 예정으로 알려져 있으나, 날짜는 약간 유동적이라는 것이 회사의 공식 입장이다. 반면 제일제당의 이런 조처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듯 한다’는 것이 삼성그룹의 입장이다. 뭔가 못마땅하지만 딱히 말릴 명분도 없다는 뜻이다.
“공격적인 다각화 전략으로 거듭날 터”

제일제당은 삼성그룹 창업주 李秉喆씨의 장남 李孟熙씨 가계가 꾸려나가고 있다. 그의 부인 孫福男씨가 최대 주주이고, 손씨의 동생 孫京植씨는 회장을 맡고 있다. 이씨가 한때 삼성그룹의 대권을 물려받을 뻔하기도 해서인지는 몰라도 삼성그룹과는 내내 껄끄러웠다. 이씨는 93년 <묻어뒀던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자서전 두 권을 통해, 동생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의 미묘한 관계를 털어놓기도 했다.

한솔제지와 신세계백화점이 실제 사업에서는 모그룹과 꽤 전략적 제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제일제당은 여러 분야에서 경쟁적이다. 93년 제일제당은 삼성그룹이 합작하려다 실패한 직후 드림웍스SKG사에 대한 지분 출자에 성공했다. 영상사업뿐만 아니라 제일제당이 집중적으로 다각화하려는 유통업과 레저 분야에서도 모그룹과 격돌이 불가피하다. 지난해에는 이맹희씨의 아들로서 경영 수업중인 제일제당 이재현 상무(32) 집이 삼성그룹측에 의해 감시 당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음식료업을 본업으로 했던 이 회사는 독립 선언과 동시에 멀티 미디어 사업과 공격적인 다각화 전략(유통·레저)을 통해 거듭난다는 계획도 세웠다. 독립에 장애물로 작용했던 삼성그룹 주식이 그 일에 필요한 든든한 밑천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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