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경제]세계 자동차 업계, 짝짓기 열풍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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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열린 지난 1월12일.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벤츠 회장(53)이 크라이슬러 본사에 들러 로버트 이튼 크라이슬러 회장(58)을 만났다. 17분간 진행된 비밀 회담에서, 슈렘프 회장은 앞으로 10년 내에 세계 자동차 업체가 10개 이내로 줄어들 것이라며 합병하자고 제의했다. 이튼 회장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슈렘프 회장의 손을 잡았다.

10여 일 뒤 이튼 회장은 ‘좋다’는 뜻을 슈렘프 회장에게 공식 통보하고, 크라이슬러 이사진에도 그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후 뉴욕·프랑크푸르트·제네바·런던을 오가며 극비리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로젝트 이름은 ‘감마.’ 크라이슬러는 ‘클리블랜드’ 다임러벤츠는 ‘덴버’라는 암호명까지 사용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크라이슬러는 회담 참석자를 최고위급 임원 10명 정도로 제한하고, 매번 참석자를 바꾸어 비밀이 탄로날 경우 책임 소재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조처했다.

지난 5월6일 양사가 합병 소식을 공표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다임러벤츠는 물론이고 크라이슬러 역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잘 나가는 회사. 그런데 이들이 합치기로 결정한 까닭이 어디 있을까. 또 세계 자동차 업계는 앞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97년 합병·매수 7백건

세계 자동차 업계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이미 공급 과잉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고연비·저공해·저사고 차량을 만들기 위한 기술개발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경쟁력 없는 업체는 도태할 수밖에 없고, 살아 남으려면 ‘적과의 동침’도 불사해야 한다. 지난해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7백건이 넘는 합병·매수가 이루어진 것도 모두 치열한 적자생존의 격전장에서 살아 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 역시 돌파구가 필요했다. 크라이슬러는 20년대 중반 월터 크라이슬러가 설립한 회사로 한때 포드를 앞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줄곧 GM·포드에 밀렸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군소 회사를 인수해 왔다. 80년대에는 아메리칸 모터스를 흡수했고, 아이아코카가 회장으로 있을 때는 피아트를 합병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다임러벤츠는 유럽 최대 기업으로서 항공·전자·중공업과 함께 메르세데스벤츠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 90년대 들어 벤츠의 영업 실적이 부진하자 직영 체제로 바꾸고, 2000cc 이하 중·소형차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다임러벤츠의 다음 파트너, 미쓰비시 유력

그러나 중·소형차를 개발하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중·소형차를 만들다가 대형차를 개발하기는 쉬워도, 중·대형차를 만들다가 소형차를 개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GM도 한때 중·소형차를 개발하려다 포기하고, 일본의 마쓰다·스즈키와 자본 제휴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는 ‘천생 배필’인 셈이다. 이들이 합병할 경우 연간 3억달러가 절약되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중·소형차에서 최고급차까지 전 차종을 생산할 수 있고, 판매망과 생산 기술을 공유할 수 있어 GM·포드·도요타에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다임러벤츠는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닛산의 자회사인 닛산디젤을 인수하기로 하고,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닛산디젤은 일본 4위의 트럭 제조업체로서 지난해 28억달러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닛산자동차에게는 골칫덩어리나 다름없다. 60년대 일본 정부의 산업 합리화 조처에 따라 억지로 맡게 되었는데, 현재 떠안고 있는 빚만 3백억달러(4조엔)에 이른다. 동남아가 주요 수출 시장이었는데, 최근 이 지역의 외환 위기로 인해 닛산디젤까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자동차 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다임러크라이슬러(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회사 이름)가 과연 닛산자동차까지 흡수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이튼 회장은 다임러벤츠와 합병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아시아 지역에서 파트너를 찾고 있으며, 투자·제휴·인수 등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다임러벤츠 대변인 에크하르트 장거는 닛산과 협상하고 있는 것은 상용차뿐이고, 승용차는 제외했다고 못박았다.

이 때문에 주목되는 기업이 미쓰비시이다. 미쓰비시의 지난해 매출액은 1백80억달러. 슈렘프 회장은 “미쓰비시는 대단한 회사이다. 우리는 미쓰비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미쓰비시는 크라이슬러·다임러벤츠와 오랫동안 긴밀하게 협력해 왔다. 크라이슬러가 한때 미쓰비시에 출자하기도 했고, 크라이슬러가 어려움에 빠져서 자본을 철수했을 때에는 미쓰비시가 크라이슬러 호주 공장을 비싼 가격에 인수해 간접으로 돕기도 했다. 미쓰비시는 현재 크라이슬러에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 완성차와 엔진을 공급하고 있다. 90년대 초 미쓰비시는 다임러벤츠와도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아시아 파트너는 닛산이 아니라 미쓰비시가 될 공산이 크다. 일부에서는 미쓰비시가 트럭 부문에서 엄청난 순익을 내고 있기 때문에,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닛산디젤을 인수한 뒤 이를 미쓰비시가 경영하도록 맡길 가능성도 있다고 점치고 있다.
도요타·포드 등도 ‘합종연횡’ 모색

유럽­북미­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다임러크라이슬러의 공세는 경쟁 업체들의 공동 대응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항축은 도요타­GM­폴크스바겐이다. 도요타는 이미 GM과 NUMMI라는 자회사를 미국에 설립한 상태이고, 폴크스바겐과는 제품 교환 생산·기술 교류 등에 합의한 상태이다. 그리고 폴크스바겐은 GM의 독일 자회사인 오펠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운 경험이 있다.

이들 3사는 10여 년 동안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만약 이들이 협력을 강화한다면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항축은 포드-닛산이다. 이 축의 특징은 유럽 파트너가 공석이라는 점이다. 물론 포드의 자회사인 유럽포드와 재규어 등이 있지만, 다임러벤츠나 폴크스바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밖에 푸조(프랑스)와 피아트(이탈리아), 르노(프랑스)와 볼보(스웨덴)가 합병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푸조는 프랑스 최대의 자동차 업체로서, 판매량의 85%정도가 서유럽, 특히 스페인·영국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피아트는 스페인과 영국 시장에서 취약하다. 시장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합병에 따른 이득이 클 수밖에 없다. 양측은 이미 세벨이라는 합작 회사를 설립해 미니밴을 생산하고 플랫폼을 공동 이용하고 있다.

볼보와 르노도 합병할 가능성이 높은 ‘커플’로 손꼽힌다. 양측은 94년에 이미 합병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볼보측 주주들이 반대해 결렬되고 말았다. 르노는 소형차가 강한 반면, 볼보는 고급차 시장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독불 장군’은 이제 더 이상 발 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세계 시장을 가르는 3대 축에 들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대우가 GM과, 기아·삼성이 포드와 손잡으려고 하는 것도 세계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술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과 손잡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연인 간의 사랑이 그러하듯,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유럽의 자동차 업체들이 한국을 아시아의 생산 거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관건은 국내 업체들이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가, 그들에게 매력적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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