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빈 수레’ 실직자 재취업 교육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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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미달 프로그램 탓에 실질적 도움 못줘…“훈련 통한 취업률 10%도 안될 것”
실업 폭풍에 휩쓸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재취업을 위한 무료 교육 과정에 등록하면 이들에게는‘훈련생’이라는 생소한 명칭이 붙는다. 재취업 교육 과정 중 받는 고용보험기금의 명칭도‘훈련 수당’이다. 제대로 훈련해서 적재 적소에 재배치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아무래도 명칭이 정부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을 보면 교육은커녕 훈련마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우려된다. 4월 말 현재 전국에서 실직자 재취업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은 모두 2만7천여 명. 정부가 올해 1천3백50억원으로 실직자 8만명을 재취업 훈련시키기로 한 목표의 30% 이상을 벌써 시행한 셈이다. 실직자 처지에서는 무료 재교육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기업들이 신규 채용이나 경력자 채용 통로를 모두 닫아 버린 상황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닌다고 취업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닌 바에야 몇달 동안 ‘공부’하면서 재충전할 기회를 갖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명칭이야 어떻든 문제는 훈련 내용이다.

사무직 실직자 위한 강좌 거의 없어

과거 직업 교육은 자동차 정비·미용·도배 등 블루칼라들의 기능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지금과 같이 일반 사무직 실직자들이 쏟아져 나온 적도 없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취업 교육을 한 경험도 전무했다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정보검색사·물류관리사·유통전문가 등 백 개도 넘는 교육 과정 어디에도 재취업을 원하는 실직자들 요구에 맞추어 강좌를 개설한 흔적은 없다. 그동안 이미 진행해 오던 수강 과목을 펼쳐 놓고 ‘하나만 찍으라’는 식이 거의 전부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한국생산성본부가 마련한 재취업 강좌는 개설 과목 23개 중 무려 16개가 1주일도 안되는 초단기 강좌이다. 전문가들은 교양 강좌 수준의 이런 초단기 강좌들이 재취업하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사무직 실직자에게 가장 큰 인기를 모으는 강좌는 인터넷정보검색사·주택관리사·M&A 전문가이다. 물론 재취업이 아닌 창업을 노리는 창업 특강은 시기에 관계 없이 인기 상한가이다. 그러나 재취업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 있게 전망을 내놓지 못한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재취업 교육을 통한 취업률이 결코 10%를 넘지 않으리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훈련 수료 후 취업률 90% 이상인 훈련 기관에 우선적으로 훈련을 위탁한다’는 노동부의 인센티브 방침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노동부 관계자조차 프로그램의 목표를 재취업에서 실직자의 자질과 능력을 유지·보존하는 쪽으로 궤도 수정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물론 전문 산업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대학 등에서 공공 강좌를 열어 실업자 대책에 동참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정부의 지원 기금으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고 느낀 교육기관 중에는 벌써 강좌 포기를 검토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실직자를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 양성 등 정보통신 전문 강좌를 열고 있는 현대정보기술 정재학 과장은 “강사나 강의의 질에 관계 없이 지원 기금이 획일적인 데다, 숙박 시설 사용료까지 포함하면 회사 이미지 제고를 위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지출이 지나치다”라고 말한다.
‘위장 실직자’ 가려내지 못해 기금 낭비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은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이 두 달 넘게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이른바‘위장 실직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위장 실직자들을 잡아내지 못하면 고용보험기금이 엉뚱한 데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재취업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도중 다른 직장에 취업이 된 사람은 수강 자격이 없어진다. 그런데도 취업을 해놓고도 노동사무소에 신고하지 않은 채 계속 실직자 강좌를 듣는 경우가 일부 교육기관에서 나타나고 있다. 재취업한 기관의 출근 일자를 조금만 늦춰 놓으면 어렵지 않게 가능한 일이다. 노동부 박용웅 능력개발과장은 “사업주가 실직자를 고용하고 나서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직자 본인이 재취업한 사실을 신고하지 않거나 사업주가 신고를 늦추면 위장 실직자가 실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라고 말한다.

한국노동연구원 강순희 연구위원은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이 △예산 낭비와 중복 투자 우려 △재취업 가능성에 대한 검토 부족 △실직자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수강 과목 설치 등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출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현재 제도에서는 수강생이 수강을 포기해도, 훈련기관이 계속 수강하고 있는 것처럼 속여 기금을 계속 타낼 가능성도 많다”라고 분석했다. 늘어나는 실직자를 어떻게든 수용하기 위해 양적 팽창에만 집착한 나머지 고용보험기금이라는 준조세를 재원으로 하는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이 표류하고 있는 셈이다.

“9월 말에 훈련 기금 바닥날 수도…”

오는 7월부터 정부는 실업자 재취업 훈련 대상을 근로자 10인 이상 고용보험 적용 사업장에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정리 해고가 예상되는 6·4 지방 선거 이후와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실직자가 많이 몰려들 것이다. 한국표준협회의 한 관계자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9월을 넘어서면 재취업 훈련 기금이 바닥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직자 재취업 프로그램을 개선·보완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를 이끌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김재구 연구위원은 “외국 자본 유입에 따른 신종 직업 가능성을 타진하고,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 등을 거쳐 6월까지 표준 교육 모델을 5개 만들어 낼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것은 실업자 대책의 첫 단계이다. 실직자들에게 고기를 주는 대신 고기 잡는 법을‘훈련’한다고 하더라도 어장에 언제쯤 고기가 몰려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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