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직원 ‘복지 부동’ 총수님 탓이옵니다
  • 梁東彪 (딜로이트 앤드 투시, 파트너) ()
  • 승인 1996.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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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좌우에 사람은 많은데 막상 무슨 결정을 할라치면 무엇이든 회장님이 직접 해야 하고, 일을 하나 시킨 뒤에는 일일이 챙겨야 하고, 그래서 직접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탄식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두눈에 생기가 초롱초롱하던 신입 사원이 중견 간부가 되어서는 회사가 고비를 넘기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말년에는 드디어 회사에서 최고 책임을 맡는 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그토록 여러 차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던 그가 사장이 된 다음에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머지 않아 주변에는 아첨배들만 남겨놓고 회사를 위해 직언하는 부하들은 모두 내치고 보지 않습니다.

회장님, 미국에서는 이런 사람을 ‘CEO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회장님의 기업에서는 회장님께서 언제나 최종적인 결정권자이므로 소생은 이 병을 ‘회장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행하게도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을 잘하다 보니까, 그래서 성공하고 보니까, 남의 말은 들을 것도 없고 무엇이든 직접 처리해야지 다른 사람은 믿기지 않아 맡길 수 없는, 그래서 모든 결정을 죄다 혼자서 내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가련한 독선병, 이것이 회장병인 것입니다.

예스맨들 ‘회장님의 이름으로’ 세력 다툼

회장병에 걸리고 나면 그 사람 주변에는 예스맨들이 득시글거릴 뿐 실제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회장님 눈치만을 기막히게 살펴서, 5공 때 전심(全心) 살피고 6공 때 노심(盧心) 살피듯 참모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회장심(會長心)을 간파해 내는 것으로 집약되게 됩니다. 실력 있는 참모는 견뎌내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며, 회장님 주변은 곧 인의 장막으로 몇 겹씩 둘러싸이게 됩니다. 인의 장막은 봉건 제후처럼 세력 다툼을 일삼고, 매사를 정치적 싸움으로 확대해 상대방을 매도하는데, 이런 못된 짓을 모두 회장님 이름을 빌려 자행합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는 혹시 이런 증세가 없으신지요. 좌우에 사람은 많은데 막상 무슨 결정을 할라치면 무엇이든 회장님이 직접 해야 하고, 일을 시킨 뒤에는 일일이 챙겨야 하고, 그래서 직접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탄식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그것이 바로 무서운 회장병 증세입니다. 회장님께서 결정권을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서만 부둥켜안고 계시니까 자연히 부하들은 회장님 눈치만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현지 법인의 사장이 이곳의 사사건건을 시시콜콜 다 회장님께 보고해야 하니까, 여기서는 아무런 의사 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에 양반님이 ‘얘들아, 비가 오시겠다, 멍석 걷어들여라’ 하면 이 말을 들은 마름이 머슴에게 ‘이놈아, 멍석 걷으랍신다’ 하고, 머슴놈은 어슬렁어슬렁 와서 ‘아직 비가 안오는데요’ 어쩌고 볼멘 소리를 하면서 멍석을 걷던 장면과 흡사합니다. 멍석을 언제 깔고 어느 상황에서 걷어들여야 할지는 머슴놈도 판단할 수 있는 일인데, 아니 어쩌면 머슴놈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데, 그것까지 일일이 양반님께서 명을 하다 보니까 마름은 가운데서 이러랍신다 저러랍신다 하고 복창하는 것이 본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끼놈, 나는 매사를 우리 사장들한테 맡겨서 하는데 네가 어찌 옛 얘기까지 꺼내가면서 나를 욕보이려 하느냐’ 하시겠지만, 회장님, 지난번 미국에서 창고 건물을 구입하려던 때의 기억이 안나십니까. 장소와 규모와 생김새까지 일일이 회장님의 오케이가 있어야 했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값을 흥정하는데 ‘백원 더 내려라, 50원 더 줘라’ 하시는 바람에 이곳의 현지 사장 이하 담당 부장과 변호사가 모두 내리랍신다 더 주랍신다만 복창했습니다.

또 김치 공장을 인수하던 때도, 현지에서 변호사·회계사 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공장에 김치 냄새 공해 문제가 있다느니 생산비가 높아 배추값도 안나온다느니 의견이 분분했으나, 현지 임원들은 회장님의 의사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며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회장님 뜻보다는 전문 경영인의 판단으로 기업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래야 그 경영인은 의사 결정의 잘잘못에 의해 경영 능력을 평가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매사를 회장님 뜻대로 할 것이라면 그토록 많은 임원진을 주변에 고용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경영은 임원들에게 맡기고 회장님은 이들에 대한 코치 노릇을 하셔야지요.

소생의 좁은 소견으로는 회장님 주변에 정치 게임을 일삼는 제후들이 둘러서서 봉토 싸움을 하느냐, 아니면 전문 경영인들이 둘러서서 시장 개척을 논의하느냐는 순전히 회장님께 달린 일입니다. 회장님이 회장병에 걸려 내가 무엇이든 다 결정한다고 고집하시면 아무런 결정도 할 필요가 없는 측근들은 곧 정치 제후로 변할 것이고, 회장님께서 의사 결정권을 측근에게 이양하시면 그들은 참된 전문 경영인이 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 이미 잘 아시는 것을 소생이 감히 되풀이하자면, 의사 결정권 이양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은 업무 평가입니다. 경영인의 업무 수행 내용을 평가하시고 평가된 대로 상벌을 주시면, 회장님의 기업은 일취 월장 성장에 성장을 거듭할 것입니다.
아직도 회사를 세습하려 하십니까

근무 평가라는 개념이 결코 생소한 개념이 아닌데도 왜 우리한테는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부 용역에 의존하신다면 아무런 실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 내부 사람이라고 해서 근무 실적 없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고 월급도 준다는 것은 돈 낭비일 뿐 아니라 곁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이기도 합니다. 근무 평가는 ‘책임’이라는 개념에서도 몹시 중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현지인 고용이 늘면서 더욱 더 중요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책임지는 풍토에 익숙한 사람들인데 한국 회사에 취직했더니 일을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 아무도 챙기고 따지는 사람이 없더라 하니까, 처음에는 당황하고 어색해 하다가 어느새 ‘원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직장도 있구나’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다고 하더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호봉제라고 하는 것이 일 잘하고 못하고와는 상관 없이 세월이 가면 월급을 올려주는 제도이니 어느 미친 놈이 일을 잘해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공연히 사고라도 치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인데요. 그러니 복지 부동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세월 가면 월급 타먹는 것이 장땡이지요. 근무 평가가 없는 한 우리 기업 문화에서 무사 안일과 복지 부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생이 기왕 회장님은 물론 회장님의 참모진으로부터도 죽일놈으로 낙인 찍히고 당장 내달 김포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다리 부러지지 않게 조심조심해야겠다고 작심하고 이 상서를 올리는 길이니, 한 말씀만 더 하자면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회장님의 후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세계적인 규모가 된 기업을 반드시 아이들에게 세습제로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이들에게 경영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이 있는지를 먼저 묻고, 그 다음으로는 경영 능력이 있는지를 검토하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렵사리 이루어 놓은 기업을 경영에 관심이 없거나 무능한 아이들한테 넘겨주어 순항하는 배를 난파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전문 경영인에 의해 잘 운영되고, 따라서 주식 가격이 올라가면 아이들은 대주주로서 대만족할 것이고, 그들의 앞날도 불로소득이 늘어나므로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후계 문제는 누가 가장 능력 있는 경영자인가를 잣대로 해서 결정하시옵소서.

회장님, 세상은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류 기업으로 승승장구해온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와 AT&T, 독일의 다임러벤츠도 창사 이래 최대 규모로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기업은 이제 막 세계 무대에서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에 대처함은 물론 앞서서 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던 시대는 이미 80년대에 다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5년이나 10년 후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비전은 회장님만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의 역할이 한 가족이나 친인척을 부자로 만드는 것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된 옛 이야기입니다. 회장님의 역할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소생과 같은 미천한 백성도 더 이상 회장님을 미워할 수가 없고 회장님 잘 되기만을 기대해야 하는 빼도박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회장님, 길 잃은 양떼 같은 저희 미물들을 위해서라도 불초 소생의 이 상서를 한번만 신경써서 읽어 주시옵소서. 조선 말기 개화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테니스를 치는 모양을 지켜보던 어느 양반님이 ‘저런 땀나는 일은 종놈들이나 시킬 일이지. 어째서 자기가 손수 하느라고 저리 땀을 흘린단 말이냐, 쯧쯧쯧’했다고 들었사옵니다. 소생의 상서를 아랫사람 시켜 읽게 하지 마시옵고 회장님께서 직접 읽어봐 주시옵소서. 테니스를 직접 쳐야 운동이 되듯 회장님께서도 가끔씩은 몽매한 자들이 올린 상서를 직접 읽으셔야 기업 경영에 양분이 될 것이옵니다.

건방지고 방자한 소생이 다만 회장님과 기업의 밝은 앞날을 위한 충정으로 무릎 꿇고 돈수 재배하며 이 상서를 올리옵나이다. 그럼 불초 소생 이만 붓을 놓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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