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영국·멕시코 성공한 나라 아니다
  •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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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구제 금융을 받는 순간부터 한국 정부는 영국과 멕시코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기 극복에 성공했다는데, 과연 그럴까?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강행한 까닭은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노동력, 미국의 선진 기술과 자본을 한데 묶어 세계 최강의 경제권으로 발돋움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멕시코는 개방과 무역 자유화에 따른 소비 수준 상승과, 무역 및 자본 수지 적자라는 세계화 시대의 복병을 다스리지 못했다.

94년 12월부터 96년 7월까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멕시코는 미국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마킬라도라(투자자유지역)의 공장들은 대부분 미국 상품을 제조하고 있으며, 1천5백여 개에 달하는 기간 산업의 공장들은 거의 미국인 소유로 되어 있다. 멕시코의 금융 시장이 월가의 큰손에 장악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민족 경제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 자본이 멕시코 사회에 이식하는 사회 제도와 관습, 정책 결정 및 권력 구조가 ‘경제 주권을 갖춘 선진국’을 바라는 멕시코의 꿈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멕시코, 경제 주권 미국에 반납… 영국, 만성적 경기 침체에 허덕

IMF 체제를 어느 정도 극복한 듯이 보이는 멕시코의 경제는 워싱턴과 월가의 결정에 그대로 따라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데킬라 쇼크’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멕시코인들을 기다리는 미래의 덫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철석같이 믿듯이, 영국의 대처는 IMF 위기를 극복한 일급 기사(騎士)인가? 80년대 영국 경제를 회생시켰다고 칭송받는 대처리즘은 한국 사태에도 잘 듣는 묘약일까? 나는 ‘아니오’라고 단정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처리즘은 76년 IMF 사태 이후 영국의 경기 침체를 장기화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눈길을 끄는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 보고서>는 영국의 경험을 바람직한 전형이라고 설정했는데, 나는 그 시각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미국은 케인스주의의 나라 영국에서 케인스주의를 몰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고 치부하고 싶을 것이다. 케인스주의를 고수했다면 사정이 나아졌을 것이라는 근거 역시 희박하지만, 대처리즘이 추종했던 통화주의적 처방은 지극히 저조한 영국의 경제 실적을 무엇으로 변명할 것인가?

IMF 구제 금융에 서명한 76년 이후 지금까지 영국 경제는 저성장·고물가·고실업에 시달려 왔다. 85∼87년의 호황도 잠시였을 뿐, 곧 불황 국면으로 바뀌었다. 또한, IMF 조건 이행 기간인 70년대 후반기에 비해 대처가 집권한 80년대가 경제 성장이나 그밖의 측면에서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크루그먼이 비판했듯이, 대처의 자문가들은 실물 경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통화 정책이면 다 된다는 기대를 결코 버린 적이 없었다. M3(총유동성) 정책이 실패하면 환율을 방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실물 경제는 상승과 하강, 호황과 불황을 되풀이하면서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어갔다. IMF 위기 사태를 계기로 영국의 통화주의자들은 미국의 정책가들보다 더 철저하고 정성스럽게 통화주의 원칙을 고수했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실업률이 두 자릿수로 뛴 90년대 내내 통화주의자들이 실패를 자인하지 않은 채 더욱 완강하게 통화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민영화가 공공 부문의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소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요약하건대 멕시코와 영국을 ‘성공한 사례’로 상정하는 한국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내 나름의 뚜렷한 복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IMF 처방전의 적실성과 그 예상되는 결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할 단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IMF식 통화주의 처방은 실물 경제와 임금 생활자의 희생을 요구한다. 멕시코는 경제 주권을 반납했으며, 영국은 연장된 경기 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통화주의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IMF 사태를 해결하는 데 실물 경제는 뒷전에 두고 통화량 조절에 집착하는 IMF 당국과 한국 정부가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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