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숨통 죄는 달러의 정체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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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국제 통용 화폐로 자리잡아…미국, 세계 지배 굳히는 지렛대로 이용
“달러를 달라.” 외환 종사자들은 숨이 턱턱 막힌다. 돼지 입에 달러를 한움큼 물려 놓고 달러가 많이 들어오게 해달라고 고사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 달러 가치가 상승해 한국 경제가 요동칠 바에는 원화를 버리고 아예 달러를 유통시키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농담도 나오고 있다. 우리의 숨통을 움켜쥔 달러, 그 정체는 무엇인가.

달러는 독일어 요아힘스탈러(Joachimsthaler)를 줄인 말 ‘탈러(thaler)’에서 나왔다. 요아힘스탈러는 보헤미아의 요아힘 골짜기에서 은광을 발견한 쉴리크 백작의 지시로 1519년 처음 제작한 은화 속의 인물 이름이다. 이후 탈러 은화는 유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나라에 따라 달러(dalerr)·달라(dalar)·다알더(daalder)·탈레로(tallero)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1873년 독일이 화폐 단위를 ‘마르크’로 정함에 따라 독일에서 탈러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탈러는 아메리카의 스페인·영국 식민지에서도 통용되었는데, 미국은 1792년 달러를 공식 화폐 단위로 채택했다. 이 시기 세계 통용 화폐는 영국의 파운드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파운드는 영국과 동반 쇠락했다. 대신 중화학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국이 유럽에 대한 수출을 늘리면서 채권국으로 등장했다. 이때만 해도 금 본위제였다. 미국의 무역 흑자 덕분에 유럽에 있던 금이 대거 미국으로 이동해, 32년 42억달러이던 미국의 금 보유고는 44년에는 무려 2백44억달러로 늘었다.

지금 미국은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최강국이지만, 30년대 공황이 발생했을 때는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 유예)을 선언한 ‘그렇고 그런’ 나라였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세계 주요 국가들은 새 국제 통화 제도를 모색했다. 이에 따라 44년 7월1일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튼우즈에서 44개국 대표가 모여 만든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이다. 국제통화기금 출범은 달러화가 파운드화의 자리를 대신했음을 의미한다.

76년 변동환율제 채택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 1온스=35달러’로 고정한 체제였다. 그러나 이 비율은 인플레 때문에 유지되지 못했다. 인플레는 월남전 전비(戰費)로 인해 더욱 상승했다. 71년 8월15일 견디다 못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35달러=금 1온스’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닉슨 쇼크’로 명명된 이 사건은, 막 산업화에 들어선 한국에게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에는 충격 그 자체였다.

73년 선진국들은 미국 스미스소니언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금에 대한 달러 가치를 절하하고 달러에 대한 다른 주요국 통화 가치를 절상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금 1온스의 가치는 42달러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스미스소니언 체제 또한 달러화의 지속적인 가치 하락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76년 국제통화기금 회의를 위해 자메이카의 킹스턴에 모인 대표들은 각국의 화폐 가치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변동환율제 채택을 공식 결정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과 서독이 엄청난 대미 무역 흑자를 올리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미국은 85년 9월 주요국 대표들을 뉴욕의 플라자 호텔로 불러들여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달러에 2백30엔 선이던 엔화의 가치가 계속 올라 89년에는 1백10엔, 95년에는 80엔대까지 치솟았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과 서독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한 인위적인 조처였다. 그럼에도 연간 6백억∼천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전혀 줄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국가들의 대미 무역 흑자까지 늘어나자, 미국은 무역대표부와 슈퍼 301조를 동원해 동북아 국가를 몰아붙이고, 미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적 소유권제 도입 등을 강요했다. 95년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TO)는 미국의 그같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영어와 달러를 지렛대로 삼아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 미국의 세계 정책이다.

한국, ‘돈놀이’하다 위기 자초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달러 위기는 왜 일어났나.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전문가들은 세계무역기구 창설을 비롯한 미국의 국익 확대가 근본 원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품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듯, 환율이라고 불리는 달러의 가격 또한 수요와 공급량에 따라 결정된다. 국내에 달러가 많아지면 환율이 떨어지고, 달러가 귀해지면 환율이 올라가는 것이다.

5공화국 말부터 6공화국 중반까지 한국은 계속된 무역 흑자로 달러 보유량이 늘어나 환율이 6백원대(89년)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92년 이후 한국의 경상 수지는 한 해를 빼고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국내 보유 달러가 줄어 97년 가을까지 환율은 9백원대로 완만히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92년 이후 97년까지 경상 수지 누적 적자액이 5백억달러인데도 환율이 9백원대까지밖에 오르지 않은 것이 지금의 외환 위기를 부른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환율이 완만히 상승한 것은 이 시기에 한국이 주식 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 펀드 등 한국 주식 시장에 진출한 외국 자본은 한국의 달러 부족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한편 종금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기관들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이 달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신용이 높아진 것에 착안해, 선진 금융기관에서 싼 이자로 달러를 빌려 동남아 국가에 고금리로 제공했다(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1백50억달러로 추산된다).

이같은 ‘돈놀이’ 덕분에 경상 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달러 부족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97년 여름 동남아 국가들에 외환 위기가 몰아닥치자 사정이 바뀌었다. 태국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등이 모라토리엄 직전까지 몰리자, 종금사에 달러를 공급하던 외국 금융기관들이 ‘한국은 과연 안전한가’하며 한 발 빼기 시작했다. 외국 금융사들은, 한국의 종금사들이 단기로 빌린 달러 외채의 만기를 연장해 가며 동남아 국가에 장기로 빌려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IMF 한파로 끝난 한국인의 ‘일장춘몽’

단기채가 일시에 ‘스톱’되자 급작스레 한국 외환 시장에 위기가 발생했다. 재경원은 환율이 절대로 ‘트리플 디짓’(10³=천원)을 넘길 수 없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치고 있었던 만큼, 환율 방어를 위해 보유 달러 매각에 나섰다. 그러나 한보·기아 등이 연쇄 부도로 무너지자, 퀀텀 펀드 등 외국 투자자들은 97년 10월 중에만 주식 1조원어치를 순매도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내놓은 달러(약 10억달러로 추정)로 바꾸어 철수해 버렸다.

이로 인해 환율을 잡지도 못하면서 한국은행의 외환고만 바닥 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결국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외환 위기는 외환 유동성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러한 위기는 지난 1월28일 한국 대표단이 뉴욕 회담에서 단기채 2백40억달러를 정부가 보증해 중·장기채로 전환함에 따라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외환(달러) 유동성이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큰데도 왜 대부분의 나라는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것일까. 먼저, 정치·경제·문화 면에서의 독립성 때문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화폐는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아무리 영어가 보편화해도 각국이 자국 언어를 유지하듯, 각국 화폐도 함께 유지 발전시켜야 할 대상이다.

두 번째, 달러를 유통시킬 경우 유통 금액에 대한 이자를 포기해야 한다는 경제적 이유가 거론될 수 있다. 미국 은행에 백억 달러를 예치하면 연 5%대 이자가 붙지만, 이를 한국에 가져다 유통시키면 이자가 붙지 않는다. 때문에 벌어들인 달러는 미국계 은행에 예치해 두고, 한국에서는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이익이다.

파나마와 라이베리아는 미국 달러화를 유통시키는 유이(唯二)한 국가이다. 이들은 국제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의 국적을 등록해 줌으로써 먹고 사는 ‘선적(船籍) 국가’이다. 나라가 작고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두 나라로서는 선적 등록이 거의 유일한 수입원이므로, 주체성과 이자 소득을 포기하면서까지 미국 달러를 유통시키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한국인은 저평가된 달러 덕분에 외국에 나가 겁 없이 돈을 뿌릴 수 있었다. 이는 빌려온 달러 덕분에 호사를 누린 ‘빚잔치’였다.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는 우리를 몽상에서 깨어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달러를 달라’에서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자’로 전환될 때, 지금의 외환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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