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꽃피는 봄’ 오면 불황 탈출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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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석유화학·철강 수출 상승세…“지표 경기 이미 회복, 체감 경기 내년 2/4분기 활짝”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15년째 숙녀 의류업을 하고 있는 김영숙씨(맵시나 패션). 예전 같으면 지금쯤 가을 옷을 사러 나올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이런 기대를 포기한 지 오래다. “말도 말아요.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면 맨 먼저 아끼는 것이 입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죽을 맛이에요.”

서울에서 6년째 개인 택시업을 하고 있는 최영모씨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40대 초반 가장인 그가 한 달 동안 버는 수입은 1백70만원 정도. 한달에 21일,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해야 이 정도를 벌 수 있다. 그는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빈 차로 다니기 일쑤다. 택시가 너무 많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바늘 구멍만큼 좁은 취업 관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학생, 인금 인상은 고사하고 명퇴를 걱정하는 직장인들,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취업 전선에 나서는 가정 주부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같은 광경은 요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황의 단면들이다.

체감 경기는 이처럼 썰렁한데도 최근 모든 경제 연구기관들은 앞다투어 경기 회복을 알리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은 것은 통계청. 지난달 말 ‘8월중 산업생산’을 발표한 통계청은 반도체·선박·화학제품 수출이 잘되어 산업 생산이 증가하고 있고, 한때 20%까지 올랐던 재고율도 8월에는 5.8%로 뚝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수출용 제품 출하율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3.4%나 늘었고, 앞으로의 경기 동향을 알려주는 경기선행지수도 지난 3월 이후 6개월째 플러스(+)를 지속하고 있다.

환율 상승이 수출 증가 핵심 요인

뒤이어 발표된 산업연구원과 한국은행, 삼성·LG·대우·현대의 부설 연구소가 내놓은 전망치도 통계청 발표와 큰 차이가 없다. 지난 7월만 해도 경상 수지 적자 폭이 1백62억∼1백95억 달러에 이르리라고 내다본 이들 기관은 최근 수출이 살아나자 적자 예상 폭을 1백50억 달러 이하로 낮추고, 경제성장률을 높여 잡았다.

이처럼 지표 경기가 호전되고 있는 것은 수출 증가 때문이고, 수출 증가는 올해 초부터 시작된 환율 상승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환율 상승은 일부 기업에게 환차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수출 주력 기업에게는 수출을 증대시키는 호재로 작용한다. 보통 환율이 상승하면 6개월 뒤부터 수출이 늘어나는데, 최근 수출 증가는 올해 초 한보 사건이 터진 뒤부터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상승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3/4분기 수출만 보더라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7%나 증가했고, 이중에 반도체·석유화학·철강이 기여한 비율은 51.7%나 된다. 한마디로 이들 세 품목이 최근의 경기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철강재. 철강재에 대한 내수가 증가하면 경기 상승을 의미하고, 반대로 내수가 감소하면 경기 하강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강재 소비는 경기 동향을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이다. 올해 1/4분기 철강재 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8%나 줄어 바닥세를 기록했다. 그후 2/4분기에는 마이너스 1.8%를 기록했다가, 3/4분기부터는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포스코경영연구소 이금용 차장은 “대개 철강재 내수가 바닥세를 벗어난 뒤 6개월 정도 지나면 경기가 저점을 통과한다. 지난 1/4분기에 철강재 수요가 바닥을 쳤던 것을 감안하면, 올해 3/4분기나 4/4분기에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 확실하다”라고 나름의 경기 진단법을 소개했다.
다음으로 수출에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반도체. 95년 최대 호황을 누렸던 반도체 경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잔뜩 찌푸렸지만, 내년부터 다시 갤 것으로 보인다.

우선 16메가D램의 경우 지난해 초에 개당 40달러였는데 올해 7달러 선까지 폭락했다. 지난해 전세계 시장 수요는 16억∼17억개. 하지만 내년에는 시장 수요가 21억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어 경기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현재 상태에서 1메가D램의 현물 시장 값은 4달러. 그러나 삼성·LG·현대는 고품질 반도체 칩을 생산하기 때문에 IBM 등에 고정 납품하면서 7∼8 달러대의 높은 가격을 받는다.

반도체 업계가 내년에 기대를 거는 또 다른 이유는 64메가D램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전세계 64메가D램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96년에 8천만개 규모였던 전세계 시장 수요가 내년에는 4억개 정도로 폭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삼성과 LG는 64메가D램 시장에서 톡톡히 재미를 볼 꿈에 부풀어 있다.

마지막으로 석유화학은 올해뿐만 아니라 내년에도 내수와 수출 양면에서 호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올해 합성원료·합성수지·합성고무 등 석유화학 제품 수출은 지난해에 비해 24.0%나 증가했고, 내년에는 25.0% 늘어날 것이다. 내수는 그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올해는 14.5%, 내년에는 9% 상승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정보통신기기·선박·사무용 기계 등이 내수와 수출에서 호조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수출 증가세는 부산항을 통과하는 화물량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올해 1∼8월 수출용 화물은 지난해에 비해 9.1%나 늘어난 반면, 수입 화물은 4.4% 느는 데 그쳤다.
기업들의 낮은 채산성이 걸림돌

하지만 수출이 주도하는 최근의 회복 추세는 일반 서민은 물론이고 기업인들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체감 경기는 항상 지표 경기보다 늦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철강·반도체·석유화학이 한결같이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품목이라는 점도 지표 경기와 체감 경기의 간격을 벌여 놓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기업들의 채산성이 여전히 낮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제품의 수출 가격이 떨어지다 보니, 수출 물량이 늘어나도 기업의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반도체이다. 기업들로서는 종전과 같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물품을 훨씬 더 많이 수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수출 물량을 중심으로 한 경기 회복 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97년 상장사의 상반기 수익률은 3.7%. 이것은 95년의 7.3%나 96년의 4.4%에 비하면 훨씬 나빠진 것이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일부 기업들은 자금난이 심각하자 출혈 수출하는 사례도 있다”라고 밝혔다.

물론 반론도 있다. 무역협회 오기현 과장은 “채산성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출혈 수출은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선임연구원도 “출혈 수출을 오래 할 수는 없다. 기업의 경상 수익률이 플러스인 것을 보면, 출혈 수출은 안한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채산성이 낮다는 데는 한결같이 동의한다.

이렇듯 수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분야가 아직 한정되어 있고 기업의 채산성이 낮다 보니 여전히 기업은 허덕이고 고용은 불안정하다. 수출 증가가 기업의 수익과 가계 소득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은행 경제조사과 임주환 과장은 “아직까지도 기업과 개개인은 장래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단기간에 급격한 상황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라고 최근 상황을 진단했다.

‘기아 사태’라는 8부 능선 넘어야 회복 가능

그렇다면 최근의 수출 신장세가 피부로 느껴지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산업연구원 온기운 동향분석실장은 “보통 6개월 정도가 필요하다. 내년 2/4분기가 되면 체감 경기와 지표 경기 사이의 격차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수출이 주도하고 있는 경기 회복 추세를 내년 2/4분기에 온전히 실감할 수 있으려면 극복해야 할 과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기아 사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 증권 및 금융 전문가들은 대부분 기아 사태가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지 않으면 최근 정부와 연구기관들이 내놓은 경기 지표는 한낱 장밋빛 환상에 그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들은 더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한 외국 증권사 임원은 “기아 사태로 인해 자금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종금사가 몇 개 더 망하는 날에는 성장률이 3∼4%로 떨어질 수도 있다”라며, 기아 사태를 조속히 매듭짓는 것이 경기 회복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 다음 장기적으로 기업의 구조 조정 작업에 본격 착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급속한 경기 회복보다는 오히려 고통스런 저속 성장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이번에도 기업들이 체질 개선을 게을리한다면, 나중에 진짜 큰 코 다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결국 지표 경기에서 드러나는 회복세를 경제 현장에서 체감하려면 ‘기아’라는 8부 능선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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