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진출 일본 기업, 성희롱 파문에 ‘흔들’
  • 런던·한준엽 편집위원 ()
  • 승인 1996.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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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逆 인종 차별’ 연일 언론에…‘아시아 기업 길들이기’ 반론도
 
영국에 일찌감치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최근 들어 인종 차별과 성 차별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70년대 초부터 영국에 상륙하기 시작한 도요타·혼다·닛산·소니 등 일본의 대기업들은 그동안 일본식 경영 기법에 영국의 숙련된 인적 자원을 결합해 영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본보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일본 기업의 경영 방식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제기되어 관심을 끈다.

일본 기업을 겨냥한 비판과 공격은 일본계 직장을 퇴직한 영국인 근로자들이 자신들이 다녔던 회사의 일본인 상사 또는 회사를 상대로 인종 및 성 차별로 인한 승진 기회 박탈, 부당 대우, 해고 등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또 회사 안팎에서 여성에 행해진 성희롱 추문도 차츰 공개될 전망이다. 일본 기업 관계자들은 기업계와 금융계를 비롯한 영국 사회 전반에 차츰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일본 기업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증이 다분히 영국 언론들의 일본 기업 ‘길들이기’ 전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2~3년 동안 한국을 선두로 대만·홍콩 등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가들이 앞다투어 영국에 공장을 건설하고 현지 기업을 합병·매수하는 등 활발히 진출해 왔다. 보수당 정부는 이같은 결과가 지난 5년 동안 펴온 외국 기업 투자 유치 정책의 결실이라고 내세웠다.

조세 감면과 보조금 지급 등 각종 투자 유치 조처로 94년의 경우 70억파운드(약 8조4천억원) 규모의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보수당 정부는, 일단 유럽 대륙을 제치고 아시아 기업들을 영국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메이저 정부의 외국 기업 유치 작전에도 불구하고 영국 언론들이 법적 판단에 앞서 문화와 전통이 다른 일본의 기업 풍토를 뒤늦게 비판하는 것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국가의 영국 공략을 겨냥한 사전 경고일 수도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designtimesp=18002>가 지난 5월26일자 특집 기사에서 한라그룹 등 한국 기업들이 새로이 진출하고 있는 웨일스 지방의 극심한 실업 사태를 소개하면서도, 유럽의 법정 최저 평균임금 6.03파운드(약7천원)보다 훨씬 처지는 시간당 4파운드(약 4천8백원) 미만의 절박한 구직자 대열을 부각한 것은, 한국 기업에 대한 불안과 경계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 신화 무너지고 있다

런던 주재 일본 특파원들은 최근 한국 기업의 영국 진출을 둘러싼 영국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태도가 일본 기업의 영국 상륙을 바라본 80년대 중반 상황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90년 2월 <인디펜던트 designtimesp=18008>는 ‘영국은 일본의 태양 아래 다시 소생하고 있다’라는 제목 아래 ‘일본 기업은 늙고 병들어 가는 영국 제조업계를 소생시키고 자극하는 영약, 또는 구세주이다’라고 크게 환영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난 5월15일 <인디펜던트 designtimesp=18009>가 내보낸 ‘식어가는 직장에 대한 애정­소송 사태 만난 일본 기업’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는, 일본 기업의 신화가 무너졌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일본 기업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성희롱을 둘러싼 소송으로 지난 1월부터 시작되었다.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인 후지은행의 외환 딜러 헬렌 밤버양은 일본인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며 해고무효소송을 내 후지은행측으로부터 변호사 비용 50만파운드(약 6억원)와 손해배상금 10만파운드(약 1억2천만원)를 받아냈다.

이어 지난 5월부터 첫 심리가 열린 일본 금융정보회사 퀵주식회사의 인종 차별에 따른 부당 해고 소송은 광우병 소동 속에서도 영국 언론들이 빠뜨리지 않고 주요 기사로 다루고 있다. 이 소송을 제기한 영국인 2명과 비일본계 아시아인은 퀵회사에 근무할 당시 자신들보다 직급과 경력이 훨씬 낮고 능력도 뒤떨어지는 일본인 직원들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를 받았으며 승진에서도 제외된 데 대해 항의하자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국 우익 보수 언론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린 것은 퀵회사의 일본인 상사가 연장자인 영국인 직원에게 “당신은 참으로 괴상한 피부 색깔을 갖고 있군. 얼굴은 마치 바위덩어리나 축구공 같고…”라고 망언을 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언론들은 키 작고 얼굴 노란 일본인 상사가 영국인 직원에게 공중으로 볼을 차는 시늉까지 하면서 던진 이 몇 마디를 빠뜨리지 않고 공개했다.

일본인의 기업 경영 철학과 독특한 기업 풍토를 찬양하면서 일본 기업체를 그토록 높이 평가하던 영국 기업계와 언론들이 최근 들어 비판적인 시각으로 일본 기업에 등을 돌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 언론들은 일본 회사에 근무하는 영국인들이 일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데도 고위 관리 직까지 올라갈 기회가 거의 박탈되어 왔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에 반해 이번 소송에 휘말린 일본 기업들은 소송 제기자들이 대부분 업무에 부적격하거나 또는 무능력하기 때문에 권고 사직을 당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인종 차별로 부당하게 해고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 경기 침체로 국내외 감원 사태 발발

 
일본 기업은 영국땅에 앞서 진출한 미국·프랑스·독일 등 선진국들에 비해 평생 고용, 전직원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등으로 직장 중의 낙원으로까지 손꼽혀 왔다. 그러나 이같은 언론의 평가와 일본 기업의 신비는 90년대 들어 차츰 무너져 가고 있다. 그 주범은 바로 일본의 부동산 경기가 겪고 있는 거품 경제 현상과 그로 인한 경기 침체 탓에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겪고 있는 회사 조직의 규모 축소와 대규모 인력 감원 사태이다.

일본인 관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83년 닛산자동차가 영국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당시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영국의 자동차 제조업계는 큰 변혁을 맞게 되었다. 로버·복스홀 등 기존 자동차 제조업체가 당시 일본식 경영 방식과 기업 풍토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 가족처럼 함께 식사하는 대규모 회사 식당과 통일된 유니폼, 작업장의 청결과 정돈, 흠 없는 완벽한 품질 관리. 그같은 일본인 특유의 기업 경영과 기업 철학이 영국 기업과 근로자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자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일본과 영국의 기업이 두 나라의 고성장과 경기 호황 붐을 타고 순항하던 80년대 중반~90년대 초에는 좀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던 문제점들이 90년대 중반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국내외 경기 침체 속에서 회사 규모와 인력 축소가 이루어지면서 보수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승진이 억제되자, 일본 회사들이 자국민 우선 원칙에 따라 영국인 직원과 근로자 들을 보수와 승진에서 차별 취급해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런던 주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한 관계자는 한국 기업이 문화와 전통이 다른 영국 사회와 기업 풍토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기업과 우리 기업이 경영 철학과 노사 구조에서 서로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한국의 기업이 해외 현지에서 살아 남으려면 현지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지역 사회에 물질적·정신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현지에 파견된 우리 상사와 주재원들이 사고 자체를 전환해 가면서 현지 피고용인들을 관리·제어할 실력과 능력을 갖추는 일이 급하다. 이것이 영국에서 일본 기업이 겪고 있는 인종 차별 시비 파문에서 우리 기업이 얻을 귀중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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